검색결과
-
작곡가 김형주 추모하는 '제40회 한국국민악회'故 김형주 선생을 기리는 무대가 오는 6월 7일(금)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에서 개최된다. 이번 연주회는 1980년 故 김형주 작곡가의 주도 아래 창립되어 44년의 전통을 가진 순수 작곡가들의 모임 ‘한국국민악회’가 주최한다. 작곡가이자 국내 음악평론가로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던 김형주 회장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며, 그의 음악을 회상하는 무대이다. 1960년대부터 2010년때까지 발표한 평론은 '김형주 평론전집' 11권으로 집대성되었다. 전인평 교수는 "작곡 활동과 국내 음악 평론 발표를 통해 큰 업적을 남긴 김형주 작곡가는 참으로 부지런한 음악가였다. 하루 저녁에 두 곳 음악회를 다니며 평론을 남긴 분이다"라고 전했다. 김형주 선생을 기억하기 위한 본 연주회는 그의 대표작인 '빗방울'로 시작하여 한국음악 창작계를 선도해 온 한국국민악회 소속 작곡가들의 다양한 창작 작품, 전인평 <명상>, 홍권옥 <신 한강수 타령>, 정순영 <흐르는 세월>, 심진섭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라단조>, 이재신 <고향>, 김미옥 <아리랑 소울>, 문성모 <한반도 아리랑>를 거쳐 김형주 선생의 <첫치마>로 마무리 한다. 이를 소프라노 석현수, 테너 유태왕, 김은 교, 바리톤 박경종, 피아니스트 김용균, 김민정, 강지혜, 이나현, 김윤경, 바이올리니스트 김정수, 거문고의 전진아와 진영란의 타악 등의 연주가 함께 무대를 꾸민다. 이에 우리나라 전통 민요의 선율과 가락을 바탕에 둔 아름다운 음악들이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질 예정이다. 작곡가 김형주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그의 작곡집으로 '추도', '김형주 동요 작곡집', '피아노 모음곡 고귀한 초상’ 등이 있으며, 음반은 '김형주 가곡집', '김형주 피아노 작품집'이 출판 됐다. 그는 작곡가 이 외에도 한국국민악회, 한국 음악평론가협의회, 한국작곡가회의 회장, 한국 음악저작권협회평위회 의장, 한국가곡학회 고문, 한국기타협회 고문 등을 역임하며 한국 음악계의 역사를 이룬 인물이다.
-
‘국악진흥법', 어떻게 시행되나?’(1)대통령과 문체부장관에 대한 기대 2003년 헌법재판소는 민족문화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국가의 은혜적 시혜가 아니라 헌법상 의무라고 판시했다. 여기의 의무 조항은 바로 헌법 제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이다. 이를 토대로 20여 년 간 뜻있는 국악인들과 국회의원들의 노력으로 국악진흥법이 지난해 6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은 ’1년 뒤’라는 부칙에 의해 오는 7월에 시행령과 규칙을 마련하여 시행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곧 주무 기관이 1년 동안 마련한 시행령과 규칙이 공개될 것이어서 귀추(歸趨)가 주목된다. 그동안 이 시행령과 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는 장관 주제하에 원로국악인들과의 1차 자문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의견수렴을 위해 5개 권역(18일 서울·경기권, 19일 강원권, 20일 호남권, 21일 충청권, 22일 영남권)을 돌며 ‘2024 함께 만들어가는 국악진흥법’을 주제로 현장 간담회(?)를 진행했다. 그리고 산하 기관인 국립극장과 국악방송 측은 아직 자체 의견을 내지는 않고 있다. 국악계 일각인 (사)한국국악협회(국악진흥법전문가위원회 위원장 박상진)와 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이사장 이영희)에서는 세미나 개최와 자체 전문위원회를 구성, 자체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그리고 개별적인 국악인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주장을 내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수많은 진흥법이 제정, 시행되어 왔다. 문화 분야만 하더라도 학술진흥법 ·영화진흥법·바둑진흥법 ·서예진흥법 ·영화진흥법’ 등이 시행되고 있다. 사실 우리 국악인들은 인접 분야의 이런 진흥법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왔다. 이번 시행되는 개별법 국악진흥법은 타 분야 못지않게 모범적으로 국악진흥이란 목적을 이뤄가야 한다는 점에서 인식을 달리 해야 할 것이다. 이에 ‘국악진흥법, 어떻게 시행되나?’를 통해 주무부서의 입장과 국악인들의 바람이 무엇이고, 그래서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를 논의 해보기로 한다. 그 첫 번째는 그간 언론을 통한 제시된 문체부의 기본 계획과 우선 표출된 국악계 의견이 무엇인가를 매체를 통해 정리하여 시행령과 기본계획에 반영되기를 기대해 본다. 특히 국악인들은 이법 시행에 있어 어떤 자세여야 함도 살피기로 한다. 매체를 통해 표출된 내용을 정리하기로 한다. #1 "국악진흥법 제정으로 'K-국악' 기회의 창이 열렸다. 국악이 세계에서 힘차게 연주되어 차세대 K-컬처 킬러콘텐츠가 될 수 있도록 짜임새 있게 지원하겠다.”(문화체육관광부 보도자료 2023. 06. 30.) #2 "문체부는 국악진흥을 위해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 등 소속기관을 운영하고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국악방송, 예술경영지원센터를 통해 올해 기준 250억 원(23년 기준) 규모의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연합뉴스 2023.06.30.) #3 "국악진흥법 시행령은 현장 국악인들의 애로사항을 잘 청취하고 숙론(熟論) 절차를 거쳐 실질적인 국악인 모두에게 피부로 와닿는 시행령 제정을 적극 검토 하겠다.”(브런치스토리 매거진 2023.11.03. ) #4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국악진흥법 시행과 관련해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공진단 2024. 03 01.) #5 "무형문화재 제도 소관 기관인 문화재청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달라고 요구했다. 내년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도록 근본적인 무형문화재 제도를 검토해 보겠다”(연합뉴스 2023.12.01.) 이상의 5개 대목은 모두 문체부(장관)의 발언이다. 주무장관의 발언인 만큼 주목이 되고 기대도 된다. 우선은 국악인 모두에게 피부로 와닿는 시행령 제정을 검토하여 "기대해도 좋다”라고 한 장담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과연 장관이 만난 이들만 국악인이고, 지방의 작은 국악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여기에 포함되는지는 궁금하다. 이 법의 시행 실익은 국악이 좋아서 끌어안고 살아오는 지방의 모든 생활 국악악인들에게도 긍지를 심어주어 전승 활동을 즐겁게 하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과는 다른 모든 국악인을 대상으로 한 시행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각 지자체에 ‘국악진흥 담당관(자)’을 배정하여 이 업무를 촉진시키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조례 제정 필요성 등을 시행령에 담아야 한다. 문체부 전통예술과를 확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지자체에 담당관을 배정하게 하는 것은 이 법의 실효성을 담보하는 제1 요건이다. 이를 이번 시행령과 규칙에 반드시 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250억 원의 사업비 집행에 대한 문제다. 국립국악원 · 국립극장 ·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 국악방송 ·예술경영지원센터를 통해 지원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곳만을 통한다면 지금까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는 적어도 문체부 내에 국악인들로 구성된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전국 지자체 생활 국악인에게까지 스며들게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대로 라면 인터넷 못하고, 기획서 못 쓰는 지역 국악인들에게는 여전히 먼 산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소위 ‘기획서 선수’나 ‘기획서 장사꾼’들만의 예산 따먹기 장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보유자 제도에 대한 극히 일부에 한정된 문제를 국악인 일반의 일처럼 의제로 삼은 것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보유자가 되려는 이나 보유자가 된 이는 이미 일반 국악인이 아닌 스타 또는 권위자이다. 세칭 누릴 만큼 누린이 들이다. 다시 말하면 극히 일부의 특별한 활동을 하는 계층이란 말이다. 그들의 활동이 대다수의 국악인들이 해당 종목의 향수자들로서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전승활동을 하는데 비해, 이들은 특별한 목적으로 활동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며, 이미 문화재청의 제도적 보호와 지원을 받는 이들로서 국악진흥법상의 국악인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기 때문이다. 이번 진흥법은 그야말로 전 국악인들에 의한 국악진흥을 위한 법이란 점에서 그렇다. 다음은 각 매체를 통해 제기된 국악계의 의견들을 정리한다. 지원이 골고루 집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6 "국악에 합당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국악은 그 지원을 바탕으로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는 전통 예술로 거듭나야 할,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뉴스퀘스트 2023 07 05) #7 "전통문화의 큰 축인 국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개별법 부재로 인해 그동안 국악에 대한 지원이 미흡한 실정이었다.”(중앙일보 2023.08.10.) #8 국악계의 체질 개선과 지원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생태계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부산일보 024.03.24.) 재정 지원에 대한 기대가 표현되어 있다. 지원이 필요 없어도 전승, 전수가 가능할 때까지는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요구이다. 얼핏 지원이 곧 진흥책이라는 단견 같지만 사실 그동안의 ‘국악’에 대한 지원은 문화 전반의 지원 중에 일부였을 뿐이다. 이제는 국악의 전분야 즉, 전통음악·전통무용·전통연희 등과 이를 재해석·재창작한 공연예술 모두에 고루 진흥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9 "대통령령으로 방송 편성법 제71조에 클래식이나 동요, 국악이 법적으로 30% 정도 비율이고 나머지 70%를 다 대중음악으로 되어있다. 국악 방송 편성 비중을 늘릴 수 있는 대통령령을 고쳐야 한다”(뉴스핌 2024.03.14.) #10 "국악의 날 제정이나 국악 주간을 만들어 공연 몇 개를 더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부산일보 024.03.24.) 전자는 방송에서의 국악 프로그램 저조 현황에 대한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국악의 방송 송출에 대해 쿼터제를 실시하여 국악 노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시적 부양책으로서는 시도해 볼만한 방법이다. 다음은 ‘국악의 날’ 제정에 대한 의견으로 다소 부정적이다. 이는 아마도 문체부가 ‘국악의 날’ 제정에 대해 우선 관심을 보이는 것에 대해 혹시라도 문체부장관이 생색 내기 제정 기념행사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제정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은 아닌 것이다. 문체부는 ‘오월 단오’를 선호하는 듯한 의견을 낸 바 있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렇다. 먼저 문체부는 스스로 밝힌 바를 시행령과 규칙에 담아 기존의 어느 분야 진흥책 보다 실질적인 진흥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지원에 대해서는 기존에 몇몇 산하기관을 통해 선택적으로 지원하기보다는 전국 곳곳의 국악인들에게 골고루 스며들게 하기 위한 심의기구를 두어 지원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단의 조치로 일정 기간 방송에서의 국악 송출을 쿼터제로 하여 부양시키는 방법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국악의 날’ 제정에 대한 의견으로, 특정 날짜에 대한 의견보다는 시행 기관의 생색내기로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것에 주목을 하여 급하게 정하지 말고 다양한 의견을 모아 결정하기를 바란다. 기획 특집-‘국악진흥법, 어떻 시행되나?’(1)의 결론은 이렇다. 국인인들은 이 법 시행령에 대해 대통령과 문체부 장관의 특별한 관심을 요구한다. 국악진흥법은 문화체육부가 마련한 시행령과 규칙으로 대통령령으로 시행하는 법인 만큼, 대통령의 국악에 대한 인식 제고와 문체부 장관의 책임을 다하여 국악을 진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국악인들은 대통령과 문체부 장관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
순천에서 판소리를 전승하는 (사)낙안읍성판소리보존회 김양남 이사장전남 순천에서 판소리를 전승하고 있는 (사)낙안읍성판소리보존회(김양남 이사장)가 올해 제10회 ‘순천 낙안읍성 전국 국악대전’을 마무리하였다. 이 대회는 2008년 7월 제1회 국악대전을 시작하여 전국 국악인들에게 명인명창 등용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낙안읍성판소리보존회는 2019년 3월 15일에는 '순천가진흥회'에서 출발하여 2020년 3월 23일 한국판소리보존회 낙안읍성지부로 창립하고, 이어 4월 17일 법인으로 설립하였다. 올해 칠순을 맞이하는 김양남 이사장은 1955년 전남 순천 태생으로 9살에 국악계에 입문하여 선동옥, 염금향, 성우향, 송순섭, 남해성 명창들에게 사사했다. 동편제 계보 송만갑- 박봉술-송순섭의 직계제자로 알려져 있다. 국창 송만갑, 박봉술, 송순섭 무형문화유산, 김양남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로 전승되어 많은 판소리 전수자를 배출하고 있으며, 특히 이영민 작자 ‘순천가’를 알리기 위하여 김양남 이사장은 많은 제자들과 순천을 알리고 있다. 김양남 이사장은 2007년 5월 15일 전국국악경연대회 한국국악협회에서 장원을 수상하고, 이어 지도를 받고 있는 회원들은 2019년 국회의장상 종합대상, 2019년 12월 전국연합방송이 주최한 한국국악대전 판소리부문 대상, 2002년 10월 22일 제3회 공주전국판소리병창 명창대회에서 국무총리상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후, 적벽가 연창회, 순천대사습 복원, 낙안읍성 달빛공연, 적벽가 완창회, 낙안읍성 상설공연, 찾아가는 라이브 공연, 벽소 이영민 선생의 고유제 등 공연과 낙안읍성판소리보존회 마을기업 국악체험사업 등을 통해 활발한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
제10회 낙안읍성전국국악경연대회 명인부 대상에 박형진지난달 순천 낙안읍성 객사에서 27일부터 28일까지 2일간 열린 (사)낙안읍성판소리보존회가 주최한 제10회 낙안읍성전국국악경연대회 명인부 대상에는 박형진씨가 수상을 했다. 단체부 대상에는 이윤옥어린이국악단(주예은, 주예은, 정다인, 송지완, 송주연)이 수상했다. 수궁가 중 '고고천변'을 불러서 관중의 박수를 받았다. 신인부 대상에는 이월재, 고등부 대상에는 김송아(한국전통문화고등학교 3학년), 초중등부 대상에는 박다경(부산중앙중학교 3학년)이 수상했다. 유영대(고려대 명예교수)심사위원장은 "순천낙안읍성에서는 27-8일 이틀간 10주년을 맞이한 "순천낙안읍성국악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 실력있고 수준 높은 경연자들이120여 명 참여하여, 안정적이고 풍성한 경연대회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평했다. 심사위원은 무형문화재 및 전국대회 대통령상 수상자 등 국악계에 권위 있는 전문가로 구성하여 공정한 심사를 진행했다. 심사의 객관성 확보를 위하여 심사 자동집계 시스템으로 평가 예선·본선 경연이 끝난 후 각 출전자의 점수를 현장에서 공개하였다. 김양남 이사장은 "2003년 창립한 (사)낙안읍성판소리보존회가 주최한 낙안읍성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 10주년을 맞이했다. 이번 국악대전은 미래 한국전통음악을 이끌어 갈 많은 국악인들이 낙안읍성에 모여 서로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면서 앞으로도 투명하고 공정한 순천 낙안읍성 전국 국악대전을 통해 국악 인재 발굴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순천 낙안읍성은 동편제의 거장인 송만갑 국창과 가야금병창 중시조 오태석 명인이 태어나고 활동한 곳이다. (사)낙안읍성판소리보존회는 2009년부터 시작된 ‘순천 낙안읍성 국악대전’에서 두 분의 얼을 기리고 전통 국악인을 발굴하고 국악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
국악인생 60여년, 한상일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한상일(1955~)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는 국악에 입문한 지 올해로 60여 년을 맞는다. 때 맞춰 지난 1월 25일 서울문화투데이 신문에서 선정하는 제15회 문화대상에서 국악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국립창극단을 대형화하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으며, 우리 민요 아리랑의 보급에 큰 기여를 해왔으니 만큼 수상은 당연해 보인다. 한 감독을 3월 30일 오전 창덕궁 근처에서 만났다. 창덕궁의 건너편에 있었던 옛 국악학교 터와 창극 연출가 허규(1934~2000) 선생이 운영하던 북촌창우극장에 대한 추억이 아련한 곳이다. 한 감독이 배우고 공연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밴 공간들이었다. 한감독의 음악 인생은 아버지 한범수(1911~1984) 선생에게서 비롯됐다. 해금과 대금 연주에서 ‘한범수류’를 만든 장인이셨다. Q. ‘한범수류’는 어떤 특색을 가졌나요? A. "진양은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가락을 짰고, 중모리에는 바리에이션을 넣었어요. 대개 산조는 판소리 어법을 많이 차용하는데 선친은 판소리 어법을 배제한 채 기악을 판소리의 아류가 아닌 개성을 갖춘 독자적 영역으로 만들었죠. 독립곡 형태의 양식을 갖는 잘 짜인 산조였어요.” 한 감독은 출생지인 충남 부여에서 옮겨와 서울서 살던 9살 무렵부터 선친에게서 악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적(소금)에 입술을 갖다 대고 ‘빈 병 불 듯이’ 소리를 내는 법부터 배웠다. 맨 처음 부른 곡은 아리랑이었다. 유일하게 알던 곡이었던 까닭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들어보시더니 ‘재능이 있다’ 느끼셨는지 ‘한번 해보자’고 하시더군요” 본격적인 교육은 배문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전문 과정이니 만큼 선친은 곡의 음악적 성격과 그에 합당한 표현법에 관한 이론을 먼저 설명하신 후에 연주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이론 먼저 기능 나중’식 교육법이었다. 산조곡은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12주기와 24주기 식 기승전결법을 배웠다. 기자는 연주가 스토리를 가진 채 청중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버지의 도제식 교육으로 소금과 대금을 사사한 후에 서울국악예고와 추계예술대학에 진학해 피리를 전공했다. 왼손잡이여서 대금 연주는 접었다. 다른 연주자들과 대금 잡는 방향이 거꾸로여서 합주에 지장을 준 때문이었다. 이후 한상일은 작곡의 길에 들어서 중앙대 대학원 작곡 과정 석사를 거쳐 1987년 국립창극단 기악부 초대 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창극에 전주곡을 비롯, 간주곡과 엔딩곡 등을 작곡해 기악 연주를 가세한다. 소리꾼과 고수 2인의 무대인 판소리와 달리 창극에는 출연자가 많이 등장하고 다양한 연기가 표출되는 만큼 기악 연주의 역할이 절대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 획기적 시도로 창극의 사이즈를 대형화시키는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필요성에 몰입한다. 서구의 오페라나 발레처럼 노래와 춤에 걸맞은 관현악단의 기악 연주가 더해짐으로써 창극 공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싶었다. 기왕에는 연주자들이 재량껏 즉흥연주로 채우던 부분을 악보에 근거한 연주로 체계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95년 1월 1일 마침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다. 이 공로로 그는 2000년 국무총리 표창과 200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후 모교인 서울국악예술고(현 국립전통예술고)에서 5년간 교사 생활을 했고, 동국대학교에서 20여 년 간 한국음악을 가르치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동국대에서 1년 정도 재직했을 때인 1999년 문화부에서 연락이 왔다. 초대 박범훈 단장에 이어 제2대 국립국악관현악단장으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관을 창설시킨 주역이었으니 만큼 자연스러운 주문이었다. 동국대 강의가 걸림돌이 됐으나 ‘강의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겠다’는 한 교수의 다짐과 설득에 당시 송석구 동국대 총장이 흔쾌히 응해주면서 그는 겸직을 할 수 있었다. 한 단장 재임 시절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그의 창의력 넘치는 작곡과 연주 지휘에 힘입어 창극, 무용 등의 장르와 동반 성장하며 "한국음악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맥’과 ‘강강술래’, ‘대(代)’ 등이 그의 분신들이다. 그는 특히 강강술래의 매력을 잊지 못한다. 진도 아낙들이 힘든 시집살이의 슬픔과 고된 노동의 괴로움을 노랫말과 군무로 씻어내는 놀이문화여서 전국화시켜 국민놀이로 승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애와 한을 해학과 긍정으로 바꾸는 지혜와 의지가 표출되는 놀이인 까닭이다. 강강술래의 다양한 버전을 작사작곡해 각계각층에 전파하고 싶어 한다. 기자 역시 대립과 갈등이 있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강강술래 놀이가 확산되면 모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강강술래의 아리랑화(化)’일 터이다. 한상일 감독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부분은 박사 코스였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 때문이었다. Q. 왜 갑자기 동양철학을 공부하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A."원래는 예악학(禮樂學)을 공부하고 싶어서였어요. 전통음악을 하다 보니 예악의 뿌리와 이론적 배경을 알고 싶었죠” 그러나 기대와 달리 유학대학원에서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 해석만 배웠지 예악에 관해서는 공부할 길이 없었다. 책도 교수진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는 결국 판소리가 어떻게 체계화됐는지의 과정을 연구해 그걸로 학위를 취득했다. 억지춘양으로 배운 것들이었지만, 경전 공부가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들어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소리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하면서 세계인이 좋아할 만한 소리를 개발하기 위해 전통악기를 개량하는 시도에 힘을 보탰던 것도 그런 영향이었다. 국악의 보전과 계승, 창작 지원 그리고 해외 진출을 돕는 ‘국악진흥법’이 지난해 6월 국회를 통과해 올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국악인들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현역의 한상일 감독도 환영을 표한다. Q. ‘국악진흥법’은 국악인들의 오랜 숙원이지요. A.-"네, 국악인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거여서 기대가 큽니다. 우리 국악사에 선을 긋는 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국악의 날’을 제정해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길이 간직해 나갔으면, 하는 희망도 피력한다. 일반의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능할 것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Q.국악이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A."국민들로 하여금 국악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여건 조성이 중요합니다. 일본이 학교 졸업식 같은 행사에 반드시 ‘사미센’ 연주를 동반하고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에도 일본 음악을 삽입하는 걸 볼 때마다 부러움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어요” 한 감독은 대중매체가 좀 더 국악 프로그램 편성에 시간을 할애하는 게 큰 힘이 되는 만큼 정책 차원에서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도 피력한다. 아울러 교육 과정에도 국악 악기 연주 코스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한때 베네수엘라의 불우 청소년 계도 프로그램이던 ‘엘 시스테마(El Systema)’를 도입해 청소년 국악기악단을 운영하던 중 지도 교수의 운영비 횡령 사건으로 중단 돼버린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 프로그램의 부활을 기다린다. 기자는 국악진흥책 시행을 계기로 세계로 뻗는 K-pop의 흐름에 K-국악도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우리 가요가 한국음악 전공자들의 가세로 탄력을 받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까닭이다. 세계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와 노래, 춤을 바탕으로 하는 킬러 콘텐츠가 나올 수 있도록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에 대한 관심도 깊다. 생애 첫 피리 연주곡이 아리랑이기도 했지만, 아리랑이 국악의 대중화와 보급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정신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Q.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A."우리 민족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아리랑에 의지해 살아왔습니다. 아리랑을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선교사이던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의 표현처럼 ‘한민족에게 쌀과 같은 필수불가결한 존재’ 혹은 고난 극복의 수단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한상일 감독은 1989년 무렵 (사)아리랑연합회 창립에 일조하며 임원을 맡으면서 아리랑의 보급과 대중화에 이바지해 왔다. 특히 발굴과 보존 및 아리랑의 가치 구현에 관심이 크다. 19세기부터 중앙아시아와 사할린 등지로 내몰린 동포들이 한국을 이루는 요소들 즉, 겨레의 글 한글과 겨레의 민요 아리랑에 의지해 고난의 세월을 견뎌 왔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들은 낯선 환경에서도 그곳 풍경을 담은 아리랑 노랫말을 우리말로 지어 불렀다. 그들에게 한글과 아리랑은 등대의 불빛처럼 어둠 속에서 앞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범민족 차원에서 북한에 존재하는 아리랑도 수집해 보존할 생각도 펴고 싶어 한다. 한 감독은 아리랑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과정에서 음원을 제작하는 공헌을 했다. 대표 아리랑을 모아 일류 장인들과 연주했다. 올 6월 대규모의 아리랑축제를 상정해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행사가 성사 된다면 수 천 명의 전국 생활국악인들이 대규모 인간띠를 만들어 대합창을 이뤄내는 순간 대한민국은 용트림을 하며 에너지를 뿜어댈 것이다. 우리 속의 편협과 미움을 떨쳐내는 벅찬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하자 한상일 감독이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라고 말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가 여생의 계획으로 ‘아리랑 정신의 구현’을 버킷 리스트의 맨 윗부분에 올려놓고 있는 까닭이다. 한 감독은 자기에게도 그 기회가 닿기를 갈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본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아리랑을 가져가 30여곡의 ‘일본판 아리랑’을 작곡했다.”라는 일본 매체의 보도를 접하면서 문화는 창조의 힘만큼이나 보존능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게 된다. 단단히 움켜잡지 않으면 놓치게 마련이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 보존과 전승 노력에 절로 박수를 치게 되는 이유이다.
-
대한민국연희춤협회 문진수 회장,<br> "각 지부 지회 연희춤 공연에 집중한다"2022년에 대한민국 연희춤협회(한국 연희춤협회)가 창립되었다. 전국 20여 개 지역에 지부와 지회가 개설되었고, 얼마 전 캐나다에도 지회가 만들어졌다. 연희춤을 바탕으로 연희춤꾼이 펼치는 꾼들이 모여서 각 지역 연희춤을 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 연희춤협회 문진수 회장을 지난 2월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가 개최되는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Q. 지난해 대한민국연희춤협회 전승 활동은 A. 2023년은 전통예술과 연희를 새롭게 해석하며 품격있는 춤과 융합하여 독립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로 재창조하고 연희춤의 지경을 더욱 확장하여, 다양한 시도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선보이며 위상을 높이는 시간이었습니다. 2023년 한 해동안 대한민국연희춤협회의 국, 내외 각 지부, 지회에서도 활발한 공연과 전승활동을 통하여 연희춤의 예술적, 독보적 가치를 선보이고 이를 통하여 전통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희춤의 가능성을 보여준 몇 개의 연희춤 공연과 전통춤의 깊은 경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였던 몇 개의 공연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와 기억에 남습니다. 먼저 아시아 1인극 축제에서 선보인 검사 위의 백사(뫼비우스)는 12발 상모춤의 전통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시대정신과 민중 저항성을 반영한 스토리텔링과 전통춤의 아름다움, 역동적인 12발의 기예를 융합하여 하나의 독립적인 공연 예술작품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으로, 민중의 소리를 듣고 예술을 통한 관객과의 소통, 공감을 의도한 작품입니다. 또한 계룡산 국제춤축제에서 초연한 산왕대신기는 뫼비우스의 스토리텔링에 이어 12발상모로 대변되는 두 마리 용과 계룡산의 산왕대신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12발 상모 연희, 신칼대신무 등의 춤, 전통 비나리, 재담을 통해 극적, 예술적으로 풀어가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희적 스토리와 함께 관객과 소통하면서 부정한 것을 정화하며, 인간의 삶과 희망을 대변하여 하늘로 전하고 기원하는 진정한 제(祭)와 굿의 의미를 실연(實演)하여 자연과 삶 속에 녹여내고자 하는 의도를 담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작품입니다. 전통춤으로는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소리꾼 김보라 선생님과의 콜라보 공연이였던 소고 입춤과 발탈 보유자이신 박정임 선생님의 구음과 함께했던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일이관지_조선춤방] 이동안류 기본무와 팔박수건춤이 있었습니다. 소고 입춤은 소고 연희의 전통적인 고증과 연구를 바탕으로 재해석한 소고춤과 문진수류의 입춤을 엮어 재해석, 재창작한 작품으로 다른 류의 소고춤에서는 볼 수 없는 연희춤의 차별성과 품격을 춤과 소고연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박정임선생님과의 국립국악원 공연 일이관지(一以貫之)를 통해서 故 이동안 선생님과 박정임 선생님의 깊은 예술 세계에 경탄하며, 창작과 재창조를 위해서는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정진을 통한 깊은 고민의 과정을 토대로 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연희 분야를 현대적 수용을 위해 재해석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무대를 보여주고 있는 문진수 회장은 남사당·승무·발탈·영광우도농악까지 4개의 무형문화재 이수자이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북, 장구) 전수자다. 그는 30여 년간 전통예술을 연마하면서 무용학 박사까지 마쳤고,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Q. 지난 해 문진수 회장님 개인적 전승활동은 A. 작년에는 코로나도 주춤해서인지 여기 저기 무대에 서는 날이 많아지더군요. 2023.01.27. 코리아그라피 우리소리 추어지다 (서울남산국악당)_ 전통을 복원한 소고춤, 전통입춤, 전통구음의 현대적 해석과 콜라보 2023.03.22 인천 서구립풍물단 심사(인천 서구립)_ 풍물단원 심사 2023.05.03. 전문직업인에게 듣는 진로이야기(의령문화원)_전통연희 진로와 방향 2023.05.11. 2023 정읍무형문화재 합동발표회(동학농민혁명기념제 황토현 특설무대)_ 정읍무형문화재 17호 악기장 전수자 2023.05.20. 통영오광대 정기공연_문진수류 12발 상모춤 초청공연 2023.06.05. 대한민국연희춤협회 정기모임 및 지부, 지회장 임명장(추가) 수여식 2023.06.08. 찾아가는 문화재 발탈 공연(오산)_채상설장구 초청공연 2023.06.10. 김복희교수 대안적 현대박물관학 네트워킹 파티_ 문진수류 설장구춤 초청공연 2023.06.14. 홍주향교 달빛타기_ 문진수류 12발 상모춤 초청공연 2023.06.18. 연희춤꾼 더 문진수의 소고춤 연수회_대한민국연희춤협회 2023.06.24.~6.25. ASIA 1인극제 거창 2023_ 검사위에 백사, 채상설장구 초청공연 2023.06.30.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 발탈(수원)_채상설장구 초청공연 2023.07.15.~16. 대한민국연희춤협회 하계연수회 2023.8.12. 자계예술촌 제20회 산골공연 예술잔치_ 문진수류 12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08.19. 2023년 국가무형문화제 제3호 남사당놀이 공개행사(운현궁) 2023.08.27. 진해 전국국악대전 풍물심사(진해문화예술회관) 2023.09.15. ART FAIR HONGJU(아리랑뮤직)_문진수류 12발상모춤, 처용무 초청공연 2023.09.16. 대전상설공연(우암사적공원)_ 문진수류 버나놀이(춤), 문진수류 12발상모춤공연 2023.09.17. 2023 세계무형유산 VIRTUOSO_ 문진수류 버나놀이(춤) 2023.09.23. 대전상설공연(대청댐)_ 문진수류 버나놀이(춤), 문진수류 12발상모춤공연 2023.09.23. 아리랑뮤직 음악회_ 문진수류 설장구춤 초청공연 2023.09.24. 2023 대한민국농악축제(강원감영)_ 문진수류 12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09.26 광양시 농악경연대회 심사 및 축하공연(광양시청)_채상설장구춤 공연 2023.10.09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한글날 경축행사(국립세계문자박물관)_남사당 덧뵈기, 열두발상모춤, 버나놀이 공연 2023.10.11. 아리랑뮤직 음악회(홍성)_채상설장구춤 초청공연 2023.10.14 오대산 문화축전_한강생명시원제(월정사)_신칼대신무, 버나놀이 초청공연 2023.10.19 사)한국국악협회 서울특별시 광진구지부 정기공연(광진나루 아트센터 대극장)_열두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10.25. 일이관지 조선춤방(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_이동안류 기본무, 팔박수건춤(박정임 구음) 2023.10.21.~10.22. 제28회 계룡산국제춤축제 산왕대신기_문진수류 덧뵈기춤, 소리, 신칼대신무, 12발상모춤, 버나놀이 공연 2023.10.28.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공개행사_문진수류 채상설장구 2023.10.29. 한국베트남 전통문화예술축제(인천시청)_ 이동안류 신칼대신무 초청공연 2023.11.04. 개천사 비자나무숲 음악회(개천사)_버나놀이 2023.11.15. 배꼽마을 치유 축제(청성 장연리)_버나놀이 2023.11.18. 남사당놀이보유자 考박용태선생님 2주기 추모공연(대전 예맥아트홀)_ 남사당 덧뵈기 전과장 시연 및 이동안류 신칼대신무 공연 2023.11.25. 대전1인극 축제_ 화엄무변(문진수류 버나놀이(춤)), 문진수류 12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12.12. 제44회 정명자 춤의 세계(한국문화재단 민속극장 풍류)_광대소고춤, 열두발상모춤 공연 2023.12.24 .오늘도 X-MAS는 춤춘다(고래문화재단)_버나놀이와 열두발 상모춤 공연 2023.12.27. 남사당과 함께하는 덩쿵~ 흥겨운 버나 놀이_버나놀이와 재담 공연 Q. 대한민국연희춤협회 소개해주세요. A. 2022년 대한민국연희춤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연희춤에 뜻을 같이하는 국내 및 해외 회원과 함께 2023년 협회창립모임을 통해 국내 및 해외 지부지회를 공식 출범하고 활발한 전승과 보전을 위한 공식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각 지부, 지회는 가(歌), 무(舞), 악(樂), 기예(技藝) 등 다양한 전통연희를 전승하고 활발한 공연과 교육활동을 벌이고 있는 전통연희 전수자, 이수자, 무용가, 문화운동가 등 전통연희와 예술 분야의 재원으로 풍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회장 문진수, 사무국장 이지원을 비롯하여 국내외 20여 개의 지부, 지회로 활동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Q. 지난해 성과는 A. 연희춤을 통한 새로운 시도를 위해 연구한 작품들이 감사하게도 평단과 관객의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연희를 보시는 관객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전통연희를 연구하는 석학과 문화운동가들에게 연희춤의 훌륭한 가능성과 가치를 선보이며 받았던 좋은 에너지를 바탕으로 전통의 재해석 재창조한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환원하는 예술가로서의 본연의 작업에 정진할 수 있었던 뜻깊은 한해였습니다. 이러한 연희춤을 통해 전통연희를 재해석하고 창조하는 데 뜻을 모으며, 이를 구체적인 전승 활동으로 구현하기 위해 2023년에 연희지도사 및 무형문화유산 지도사 등 문화예술 교육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Q. 올해 역점 사업은 A. 연희지도사 및 무형문화유산 지도사에 적합한 최적의 교육과정을 구현하기 위한 전승교육과 전승지도사의 육성에 초점을 맞추어 운영하며, 각 지부 지회의 연희춤 공연과 전승 활동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탤 예정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전승 활동과 연희춤에 끊임없이 정진하며, 새로운 시도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과 만나고 소통하며 연희춤의 무변(無邊)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또 한번 새롭게 조명하는 2024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Q. 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 A.문화의 힘이 곧 국력이자 국가의 100년 자산이 되는 글로벌문화 시대입니다, 전통문화의 흥과 멋, 예술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철학을 토대로 현대적 삶에 이를 새롭게 녹여내어 이상적인 가치로 풀어내는 예술가이자 문화운동가로서의 의식있는 연희꾼들의 뜨거운 실천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희꾼 스스로의 예술적 정진, 창조적인 도전과 더불어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과 관리, 전승 교육을 위한 시스템과 재정적 지원 등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을 통해 예술로서 창조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상생 에너지가 재생산되어 다시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며, 예술을 매개로한 정신적 부흥으로 흥과 멋, 정이 흐드러지는 모든 공동체의 기운생동(起運生動), 상생(相生)의 문화부흥 시대를 기대합니다. 문진수 -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 이수자 -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이수자 -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승무 이수자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 영광우도농악 이수자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북, 장구) 전수자 - 한양대학교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 사단법인 광양버꾸놀이보존협회 부이사장 - 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남사당놀이보존회 이사 - 사단법인 남사당 대전지회 지회장
-
이즘한글서예가전 신인작가 이광호 작가의 시선봄바람을 타고 13일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네번째 이즘한글서예가전에서 출품한 30명의 작가 중 가장 젊은 신인작가라고 한얼 회장이 소개를 한 3분의 작가 중 이광호(43세)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현재 젊은 3040세대가 담당하는 서예술의 현장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서예를 좋아하다가 대학에서 서예학과를 전공하고, 지금은 경기대학에서 서예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양시 화정동 화정캘리서예아카데미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Q. 이광호 작가님, 오늘 축하드립니다. 전통문화 '한글서예'를 향유하는 전승주체로서, 속도로 경쟁해야 하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라고 할 수 있는 서예술이 다음 세대에도 계승되어야 하는 '미래지향적 지속가능성'이란 화두를 가지고 바라본다면, 즉 서예 분야 전문인으로서 서예의 순기능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A.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디지털, 인공지능, 로롯공학, 바이오 기술 등 AI를 활용한 다양한 시도를 통하여 신혁명의 시대를 맞이하는 요즈음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오늘날과 그리고 향후에는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되는 기술과 인간이어야만 할 수 있는 기술로 나뉘는 시대가 더욱 좁혀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붓을 쥐고 향유하고 있는 '서예'라는 순수예술은 인간 본연의 인성과 감성을 화선지에 녹여내리는 격조있는 독보적 예술 장르입니다. 모든 자연과의 어울림을 통하여 나오는 붓의 선질과 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현색(玄色)으로 형상화 할 수 있는 장르이지요. AI가 근접할 수 없는 분야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감성을 소통하고, 작가의 호흡으로 읽혀지고 감상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예술 중 손꼽히는 최고의 예술이라 자부합니다. Q. 젊은 세대들만 모여서 활동하는 서예술 단체가 있나요? A.네. 경기대학교 서예학과, 계명대학교 서예학과, 대구예술대학교 서예학과, 대전대학교 서예학과, 원광대학교 서예학과 이렇게 5개대학을 졸업한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하나되어 2014년도에 결성한 '80후'(八零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저는 80후 단체에 장형(長兄)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015년도에 백악미술관에서 "동행”이라는 타이틀로 창립전을 하게 되었고, 올해에는 10주년을 맞이합니다. 80후는 문파와 학파를 무시하고, 오직 서예가 좋아서 하나가 된 단체입니다. 가볍지 않은 클래식한 전통서예를 지향하며 우리의 서예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맺어졌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젊은 청년층의 단체 중에 가장 큰 단체입니다. 전시는 매년 진행하고 있으며, 주로 인사동과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전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10주년 기획으로 중국, 대만, 일본, 말레이시아에서 서예를 전공하거나 교수로 재직 중인 젊은 친구들과 한국 백악미술관 전관에서 국제서예교류전을 준비 중입니다. 전시 기간은 2024년 8월29일부터 1주일간 전시가 진행됩니다. Q.한얼 선생님의 작품활동에 대해서 느낀 점은? A.한얼 이종선 선생님은 제가 존경하는 우리나라 한글서예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선생님입니다. 고즈넉하고 단아한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는 예술세계를 펼치시며, 결코 가볍거나 기교를 통하여 보여지는 글씨가 아닌 글씨다운 글씨를 쓰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장에서도 뒤를 잇고 있는 후학들이 본받을 만한 흔적들을 풍부하게 남겨주고 계십니다. 우리나라 서예를 사랑하고 아끼시는 마음가짐 또한 그동안 걸어오신 선생님의 행보에서 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서예진흥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헌신해 오시고 애써 주신 선생님의 모습으로 서예의 저변확대와 우리나라 서예를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선생님의 노고를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직접 전하지 못한 말씀을 이곳에 남기게 되어 뜻깊습니다. Q. 이번 '아리랑특별전'에 참여하신 보람은? A.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우리나라 선조들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아리랑 가사에 담긴 문학성에 놀라웠습니다. 저에게 아리랑은 고향에 계신 어머님 품과 같습니다. 자식과 부모가 하나 되듯이 아리랑과 우리 민족은 하나인 듯합니다. 그리운 고향에서 들려주는 아리랑은 어릴 적 나를 마주하게 되고, 잠시나마 어머님의 품에 안기는 듯합니다. 이번 아리랑특별전을 통하여 관람객들과 함께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따스함을 나누었습니다. Q.독보적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한글서예의 아름다움은 어느 부분인가요? A.우리나라 한글의 특성은 다양한 획과 자유분방한 선들이 하나되어 이루어진 화려하고 기교가 담긴 글씨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예를 통해 다양한 조형미가 완성된다고 봅니다. 우선 한글은 우리의 고유한 글씨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 남겨주신 한글의 해례본에서 이미 우리는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하나의 국가가 완전하게 탄생하였음을 알리게 되었고, 선조들이 남겨주신 편지글과 한지에 담긴 조상의 얼을 통하여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한글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뒤를 잇는 후학으로서 마땅히 이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딱딱한 펜과 연필이 아닌 붓으로 하여금 우리의 감성을 화선지에 표출하고 선조들께서 남겨주신 유산을 지켜낼 수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예술 중 한글서예는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작가는 "요즘 세상에 비인기 종목 서예를 하면서 밥 먹고 살기 힘드는데,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아서 서예를 업으로 삼고 결혼도 하고 살게 되어 행복하다" 이어 "올해는 이즘한글서예협회 신임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심사를 거친 통과의례입니다."고 하면서 기뻐했다. 초등학교 3학년에 처음 잡은 붓을 이 날까지 계속 잡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서예진흥법이 활성화 되어 서예를 경험할 수 하는 어린이가 확대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광호 작가 약력.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 고양시 미술협회 서예분과 위원장 경기대학교 서예학과 겸임교수 한국서예학회/한국서학회/한국서예가협회/한국청년서단/이즘/80후 임원.회원 화정캘리서예아카데미 主宰 이즘한극서예협회 신임회원
-
한국전통춤협회, 한국전통춤협회, "전통춤문화제 수건춤 100년사" 성료사단법인 한국전통춤협회(이사장 한혜경)가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했다. 학계에서는 이번 수건춤 100년사 재현은 학술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첫째날 해설을 맡은 원로 전통춤연구가 이병옥 교수는 수건춤은 교방춤, 재인청춤, 무속계열춤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번에 다 보여주는 판이 벌어진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둘째날 해설을 맡은은 양종승 박사는 수건춤 100년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우리 전통춤 뿌리를 알게 하고 전승 유파의 다양성을 알게 하는 귀한 무대이었다. 전통민속예술 수건춤의 지속과 변용을 보여준 학계의 평가다. 이 행사장에서 한혜경 이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Q. 한국전통춤협회 언제 창립되었나요. A. 한국전통춤협회 창립을 위해 2012년 7월 7일 창립추진위원회(위원장 채상묵, 위원 김정녀, 한혜경, 양종승, 김은희, 진유림 등 7명)가 결성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7년 4월 6일 정부로부터 공식 사단법인이 인가되었다. Q.설립 취지는. A. 한국 전통춤은 한민족 역사와 함께 탄생하여 발전되어 온 우리 고유 민족예술의 모체이자 시원이며 한민족 영혼과 사상을 담고 있는 역사이며 철학이다. 따라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춤 계승과 발전을 위해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임회원 모두는 시대적 사명감을 안고 전통춤의 무궁한 창성을 위해 전통춤의 체계적 보존전승은 물론 사회교육, 홍보진흥, 학술연구, 인재양성, 공연기획, 국제교류, 대외협력, 춤 콩쿠르 등을 위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Q. 한국전통춤협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한국전통춤창립추진위원회가 2012년 발족되고 위원장으로 채상묵 교수를 모셨다. 한민족예술의 정수, '한국전통춤'을 널리 알리고자 각 장르별 전통춤보존회로 구성되어 창립된 국내 유일한 협회이다. Q. 한국전통춤협회 창립 취지는? A. 전통은 한민족 역사와 함께 탄생하여 발전되어 온 우리 고유 민족예술의 모체이자 시원이며, 한민족 영혼과 사상을 담고 있는 역사이며 철학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춤 계승과 발전을 위해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취지를 펼치고자 전국 전통춤을 전승하고 있는 보존단체가 협력 관계로 뭉쳤다. 2012년 초부터 민족춤의 체계적 보존전승은 물론 사회교육, 홍보진흥, 학술연구, 인재양성, 공연기획, 국제교류를 위해 회합을 갖고 범 전통춤 관련자 모임을 추진하여 왔다. 이러한 결실을 맺고자 우리는 한국전통춤협회 창립과 더불어 시대적 사명감을 안고 전통춤의 무궁한 창성을 위해 더욱 분발하고자 한다. Q. 초대 위원에는 어떤 분이 동참하셨는지요? A. 채상묵교수를 위원장으로 모시고 김정녀(예능), 한혜경(예능), 양종승(연구), 김은희(예능), 진유림(예능)으로 출범했다. Q. 한국전통춤협회은 초대 이사장은 A. 초대 이사장 채상묵, 2대 이사장 이길주에 이어 3대 이사장은 제가 맡고 있습니다. Q.지난 해 얻은 성과는 A. 주요 사업으로 <대한민국전통춤문화제>, <한국춤 차세대전>, <한국춤 학술세미나>, <전통춤 학술총서 발간>, <한국춤 대경연>, <한국전통춤 보물전 해외 공연>, <전통춤 연수회>, <한국춤 전국지부공연>, <대한민국전통춤 예술대상 시상식>, <대한민국전통춤 4대 명무상 시상식> 등이 있다. 전통춤 발전과 보급을 위해 제1회전통춤대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참가 부분은 학생부, 일반부, 명인부, 신인부로 나누었고. 김숙자 명인상, 이매방 명인상, 한영숙 명인상을 제정했다. 장르는 전통춤에서 타악춤, 창작무용까지 확장했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심사규정을 엄수하고 진행은 투명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Q.올해 역점 사업은 A.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했다. 첫째날에는 이병옥 교수의 해설과 함께, 최지원의 군무 동초수건춤, 박은하의 살풀이춤, 이지은의 도살풀이춤, 고재현의 군무 교방입춤, 이정애의 쌍수건춤, 김진원의 살풀이춤, 이미숙의 군무 경기수건춤이 펼쳐졌고, 둘째날에는 양종승 박사의 해설과 함께, 윤미라의 달구벌입춤, 채향순의 살풀이춤, 권영심의 교방살풀이춤, 임현선의 즉흥무, 문숙경의 군무 살풀이춤, 김경란의 논개별곡, 이정희의 군무 도살풀이춤이 열렸다. 올해에도 제2회전통춤대경연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한국전통춤협회는 해외 지부를 거점으로 미국 및 유럽과도 연결하여 한국의 전통춤 보급과 전수 활동을 펼치려는 계획하고 있다. Q.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씀은 A.유구한 역사속에서 우리선조들의 피눈물나는 질곡의 삶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존및 계승ㆍ발전이라는 사명감에 오늘 날 찬란한 국악발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작금의 국악계는 온전한 계승의 문제점을 안고있다고 보고있다. 찬란히 빛나야 할 우리의 국악발전은 염두에 있지아니하고 이권 다툼과 계파싸움이 팽배해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의 후학들과 후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남겨줄수 있을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부분이라고 생각한다.문화유산은 먼저 올곧은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습득하고 터득된 예술세계를 물려줌이 마땅하다고 본다. 서로 일보양보하고 화합하여 개인의 영리보다는 국악계의 발전을 꾀해야 할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국악유산이 후대에 이르기까지 무궁한 보존 및 계승 발전되기를 기원한다.
-
흥사단, 전국에서 시민과 삼일절 독립정신 계승하다도산 안창호 선생이 1913년에 창립해 독립운동에 뿌리를 둔 흥사단(이사장 조성두)은 제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전국에서 삼일절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기념행사를 개최했다고 5일 밝혔다.삼일절 105주년 아침, 흥사단 단우와 회원은 각 지역에서 협심해 마치 삼일절 그날의 함성처럼 대한의 독립 정신과 참된 나라사랑을 시민과 다짐하고 나눴다.조성두 흥사단 이사장은 "3.1 운동의 결과 민주공화제를 정체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3.1 운동은 프랑스의 시민혁명, 영국의 명예혁명과 같이 옛 봉건체제를 민주공화체제로 갈아치운 시민혁명의 성격을 가지게 됐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근대 역사의 문을 열고 나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산이 꿈꾸었던 선진복지사회를 위해 노력하자고 역설했다.삼일절 행사는 전국의 흥사단 지부가 주관하고 흥사단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가 후원했다. △서울흥사단 △인천흥사단 △강원흥사단 △충북흥사단 △대구·경북흥사단 △울산흥사단 △밀양흥사단 △함양흥사단 △전주흥사단 등은 삼일절 흥사단 성명 낭독, 만세삼창, 청소년들이 외치는 삼일절 정신, 시민들과 참된 나라사랑 나누기를 진행하며 흥사단의 사회적 역할을 실천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재현하며 시민을 미소 짓게 했다.흥사단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 이춘재 상임대표는 "많은 시민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소중한 후원을 보내주고 있으며, 그분들의 마음을 삼일절에 실천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
정창관의 ‘국악-신반’ <19>국가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 '이동규 남창가곡' 우봉 이동규 가객의 남창가곡 전곡 3장 음반이다. 가객은 2001년에 조은뮤직에서 1장의 가곡 음반을, 2007년에 악당이반에서 3장의 가곡 전곡음반을 출반하였으니 17년만의 새로운 음반이다. 가곡에 입문한지 반세기를 넘긴 이제 가객의 일생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가곡 전곡 녹음에 임했다고 한다. 가객은 1964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단 악장, 예술감독을 역임하였으며, 2022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가곡’(전통가곡)은 예로부터 격조 높은 성악이다. 어떤 음역에서도 음색이 달라지지 않고 꿋꿋하며, 때로는 폭포수와 같은 역동이 용솟음치는가 하면, 때로는 단아하고 부드럽게 흐르는 정겨운 노래가 바로 우리의 가곡이다. "슬프지만 비통하지 않고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다.” 이것이 가곡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문구이다. 3장의 음반에는 25곡의 남창가곡 전곡이 수록되어 있다. 반주는 피리 김계희, 대금 유준원, 해금 이태경, 가야금 김태은, 거문고 김서영, 장구 이승백이 참여하고 있다. 쉽게 만나가 힘든 가곡 전곡음반, 이 음반에 가객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채수정의 '적벽가'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음악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대학원에서 판소리 박사 1호로 학위를 받은 채수정 소리꾼의 판소리 <적벽가> 3장 음반이다. 소리꾼은 2006년과 2015년에 ‘홍보가’ 음반을 출반하였지만, ‘적벽가’는 처음이다. 소리꾼은 현재 한국예술대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적벽가’는 중국의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 중 적벽대전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짠 판소리이다. ‘적벽가’는 크게 도원결의, 삼고초려, 장판교 대전, 조조 호기, 군사 설움대목, 주유 동남풍 기원, 조자룡 활쏘기, 적벽화전, 새타령, 조조 패주, 군사 점고, 관운장 조조 살려주는 대목 등으로 구성된 소리이며 권력 다툼, 위기 모면, 전투 상황 등의 장면이 굉장히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빠른 장단에 호령조를 많이 사용하며, 큰 성량으로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야 하는 장면이 많아 깊은 소리 공력을 요한다. 채수정의 ‘적벽가’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박봉술-박송희-채수정으로 이어지고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였던 박봉술 명창에게서 전수받은 동편제 계열의 소리로 명창 박송희 선생으로부터 사사하였다. 요즘 판소리 완창음반을 보기 힘들다. 귀한 음반이 출반되어 반갑고 해설서가 자세하다. 남도무형문화예술시리즈 13 '일노래와 놀이노래' 요즈음 국악CD음반이 귀하다. 이유는 CD를 출반하지 않고 음원사이트에만 올리는 디지털음반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추어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도 비매품 CD음반을 출반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CD음반을 출반하고 있는 기관이 국립남도국악원이다. 국립남도국악원은 2011년 남도무형문화예술시리즈 1 <영암민요>를 출반한 이래 꾸준히 이 시리즈를 출반해오고 있다. 그 13번째 <일노래와 놀이노래>(2CD)를 출반한 것이다. 음반에는 진도 지역의 소중한 일노래와 놀이노래 33곡이 수록되어 있다. 논밭일을 하면서 불렀던 일노래는 힘든 노동을 삭히는 삶의 위로였으면 소중한 아이를 재우면 불렀던 자장가는 사랑가이자 비나리였을 것이다 놀이와 함께 여흥을 한껏 고조시켰던 강강술래, 엿타령, 장타령은 일상의 기쁨을 더하는 활력소였음에 틀림없다. 가사가 수록된 해설서는 아주 자세하다. 2CD와 더불어 USB도 같이 들어 있다. 남도국립국악원 홈페리지에서는 현재 감상할 수 없지만 곧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제 국립남도국악원은 진도 지역을 마무리하고 내년부터는 남도 지역 곳곳의 소중한 자산을 모아 음반으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부디 계속 CD음반으로 출반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제주도아리랑보존회의 제주아리랑 탐라소리 (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는 묻히고 사라져가는 우리전통문화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발굴과 전파를 통해 제주인의 정신과 아리랑의 정신으로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구현하고자 2017년에 창립되었다. 첫 음반작업으로 <제주아리랑 탐라소리> 2CD음반을 출반하게 되었다. 2장의 음반은 이색적으로 제작되었다. 같은 반주에 CD1에는 제주도아리랑보존회의 여러 회원들이 다양한 구성으로 참여하였고, CD2에는 제주아리랑보존회 강소빈 회장이 선창으로 송영미, 손영숙 회원이 후창으로 참여하고 있다. 제주도의 민요를 편곡한 6곡, 작곡한 3곡, 모두 9곡이 수록되어 있다. 작,편곡은 이상군 선생이 맡았으며, 작사는 강소빈 회장이 맡았다. 음반에는 서우제아리랑, 꽃아리랑(꽃타령), 조천아리랑, 우도아리랑, 하루방아리랑 등 아리랑이 5곡 수록되어 있다. 해설서에는 서우제아리랑, 해녀서우제 등 제주방언으로 부르는 노래는 표준어와 같이 수록한 것이 이채롭다, 관심이 있는 분은 음반에 나와 있는 제주아리랑소리전수관(010-4445-6199)으로 연락하면 구할 수 있다.
-
안중근 유묵, 경매서 13억원 낙찰안중근 의사의 미공개 유묵이 27일 경매에서 13억원에 낙찰됐다. 27일 서울옥션에 따르면 이날 서울 청담동 분더샵 청담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 '인심조석변산색고금동'(人心朝夕變山色古今同)이 시작가 6억원에 출품돼 13억원에 낙찰됐다.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지만 산색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의미의 이 유묵에는 안 의사의 수인(手印)과 함께 1910년 3월 뤼순(旅順) 감옥에서 썼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낙찰자는 한미반도체다. 한미반도체는 독립운동가 곽한소 선생의 후손인 고(故) 곽노권 회장이 창립한 회사다. 지난해 12월 별세한 곽노권 회장은 생전 곽한소 선생의 기록물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 유묵은 일본에 있던 것으로, 이번 경매를 통해 국내에 돌아오게 됐다. 안 의사의 유묵은 지난해 12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용호지웅세기작인묘지태'가 19억5천만원에 낙찰되는 등 최근 경매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
한·일 교류음악회, '한국과 일본 청년 전통음악가의 만남'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한국과 일본 교류음악회를 오는 3월 20일(수)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개최한다. 이번 공연을 공동 주최하는 (재)민주음악협회*는 예술 교류를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음악문화단체로, 한국을 포함해 100개국 이상의 국가와 폭넓게 음악 교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3월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과 (재)민주음악협회가 주최한 한·일 청년 전통음악가의 만남 이후 1년 만에 한국에서 양국의 전통예술가들이 다시 만나는 뜻 깊은 자리다. (재)민주음악협회는 창립자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이 제창하여 1963년 10월 18일에 설립된 예술 교류를 추진하는 음악문화단체이다. "음악문화교류를 통해 세계인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나가 평화 창조에 기여하자.”는 이념 아래, 한국을 포함해 100개국 이상의 국가 및 지역의 음악가를 일본에 초빙해 연주사업, 음악가 해외 파견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음악박물관사업, 음악보급 사업 등을 폭넓게 하고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는 제20회 도쿄국제지휘자콩쿠르도 개최 예정에 있다. 2024 한·일 교류음악회는 한국과 일본의 전통음악, 창작음악과 더불어 양국 음악가들이 함께 연주하는 특별한 무대를 선보인다. 지난해 도쿄공연 당시, 관객들이 뜨거운 호응을 받은 양국의 협업곡인 <아리랑 연곡>과 <매화 한 송이>는 올해 다시 한국에서 연주를 선보인다. 특히 한국의 가야금, 대금과 일본의 고토, 샤쿠하치와 같이 비슷하지만 다른 역사를 가진 양국 악기들이 한 무대에서 어우러지는 조화에 의미를 더한다. 이번에 한국을 찾는 나카이 토모야(고토), 나가스 토모카(샤쿠하치·비파), 하세가와 쇼잔(샤쿠하치·비파)은 도쿄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일본의 청년예술가들이다. 이번에 연주되는 <달그림자 춤>은 보름달이 뜬 밤, 신성한 달빛에 비춰진 한줄기의 그림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같은 모습을 25현 고토와 비파, 샤쿠하치로 표현한 곡으로 일본 악기들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있다. 전통문화 상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열리는 한·일 교류음악회는 서울 국립국악원을 시작으로 국립민속국악원<3월 23일(토)>, 국립부산국악원<3월 26일(화)>까지 이어진다. 각 지역 국악원 단원들과 함께하는 무대인 만큼 더 큰 의미를 더한다.
-
전 세계 게이머 홀린 '검은사막' 속 국악 제작 비결은"국악과 서양 음악을 게임 음악에 효과적으로 접목해 녹여낼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국내 게임사 펄어비스[263750]에서 게임 음향 작업을 총괄하는 류휘만 오디오실 디렉터는 21일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국악 전공생을 위한 직업 아카데미' 강연에서 '검은사막' 속 창작 국악 작업 과정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펄어비스는 지난해 '검은사막'에 신규 콘텐츠 '아침의 나라'를 선보였다. '아침의 나라'는 조선시대를 모티브로 한국의 전통 건축, 한복, 민속놀이 등 전통문화와 각종 전설, 설화, 민담 등이 어우러진 신규 지역이다. '아침의 나라'는 출시 후 국내는 물론 북미·유럽 등 서양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검은사막의 흥행을 견인했다. 류 디렉터는 자신을 포함한 제작진 대다수가 서양 음악을 전공했고, 국악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며 "인터넷과 국립국악원 자료를 참고해 민속악부터 창작 국악까지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물놀이에 쓰이는 여러 타악기를 한 음씩 연주하면서 컴퓨터에서 작업할 수 있는 가상 악기로 샘플링하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류 디렉터는 자신이 작업한 '아침의 나라' 사운드트랙을 하나하나 국악 전공생들에게 들려주며 각각의 제작 과정과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사물놀이 장단을 바탕으로 대금, 가야금, 거문고 같은 전통 악기와 판소리의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 특징이었다. 류 디렉터는 "서양 음악 전공자로서 본 국악의 특징은 '곡선이 화려한 음악'이었다. 분할된 음이 연결된 것이 아니라, 곡선이 한 선으로 장단을 타고 변화하며 이어지는 멜로디"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악기의 농현(弄絃)이 숨 쉴 수 있는 여유로운 리듬과 멜로디, 서양식 화성에 국악의 리듬을 결합하는 시도, 펑크·블루스·소울 같은 장르와의 협주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펄어비스가 개발 중인 '아침의 나라' 파트 2 업데이트 '서울'의 내용도 언급했다. 류 디렉터는 "파트 1을 만들며 성장한 펄어비스만의 국악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시도를 하며 곡을 써 보려고 한다"며 "왕, 양반 등이 나오는 한양이 배경인 만큼 정악(正樂)을 모티브로 한 곡을 써 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류 디렉터는 'EZ2DJ', 'DJMAX' 등 2000년대 초를 풍미한 리듬게임 시리즈에서 'CROOVE'라는 닉네임으로 여러 인기곡을 작업한 베테랑 게임 작곡가다. 류 디렉터는 NHN게임스가 2009년 출시한 'C9' 작업에 참가하며 당시 게임 프로듀서를 맡고 있던 펄어비스 창립자 김대일 의장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펄어비스에 합류해 대표작 '검은사막' 사운드트랙을 작업해왔다. 류 디렉터는 "국악은 현 시대에도 예술적, 대중적으로 살아 숨쉬는 '미래의 음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강연을 듣는 국악 전공생들을 격려했다.(연합뉴스)
-
제5회 '독립운동가최재형 상' 공모전 개최(사)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이사장 문영숙)는 제5회 최재형 상 공모를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최재형 선생이 실천한 '페치카 정신'에 합당한 사람을 추천 받아 최재형 상 선정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선정된다. 접수방법은 최재형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서식을 다운 받아 작성해서 전자 메일 주소(choijaihyung@naver.com)로 접수하면 된다. 대상은 상금 1천만원과 상패가 주어지며 단체상은 명예로운 상패가 수여된다. 제1회는 2020년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에 처음 시행되었다. 첫 번째 대상 수장자는 안산 고려인단체 '너머' 창립에 큰 역할을 했던 조영인 대표가 수상했고, 2회는 옥수수 박사로 널리 알려진 김순권 박사가 수상했다. 제3회 수상자는 김준일 한문화재단 이사장이 받았고, 제4회는 이태석재단의 구수환 이사장이 수상했다. 제3회 4회 수상자는 상금 1천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제1회 단체상 수상은 영산그룹(대표 박종범), 제2회는 수산그룹(대표 정석현), 제3회는 쓰리테크놀로지(대표 이장우)가 받았다. 4회 수상기업은 한국콜마(윤동한)가 받았다. 이 외에 특별활동가 상은 상패와 약간의 부상이 있는데, 1회는 우수리스크에서 최재형민족학교를 운영하는 김 발레리아 교장선생에게 주어졌고, 제2회 때는 안산 '너머'의 기초를 놓은 김승력 대표가 받았다. 제3회 활동가 상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세종학당을 운영하고 있는 허선행 교장이 받았고, 작년 4회 때는 활동가 상이 두 명이었는데 폴란드 전 한인회장 남종석과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고려신문사 한 블라디슬라브 씨가 받았다.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은 "제2, 제3의 최재형 선생 같은 분들이 발굴 되어 최재형 선생의 페치카 정신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기를 꿈꾼다"고 전했다.
-
(31)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 윤치호 인정애국가에 대한 접근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기원 또는 명칭일 수도 있고, 형태나 내용에 대한 접근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노래라는 점에서 전통성이나 전수 현상이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이런 과제와는 달리 의외적으로 우리 현대사와 관련하여 배태된 작사자 문제가 걸려있다. 이는 역경의 근대사를 함께한 애국가의 숙명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노래의 유통과 전승이 아닌 익명성과 의례성으로 전승된 특성으로 하여 작사자 여하(如何)는 중요한 과제로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 기관인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 반이란 기간을 갖고 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복구 중이 1956년 ‘국론분열을 우려하여’라는 정치적 이유로 이를 국가에서 공식화 하지도, 법제화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잠복되었던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문제는 90년대 들어 재론이 되었다. 1998년 정부수립 50주년, 국가상징연구회 창립5주년을 기념한 세미나 ‘國歌 愛國歌에 대한 再檢討’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한국 프레스센타에서 개최한 흥사단 주최 ‘애국가 작사자 규명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연갑이 발표한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에서 학술적으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확정받았다. 그동안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譯述’의 해석 문제, 가사지의 ‘1907年 윤치호作’에 대한 오해, 이광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오류 등을 해결하였음은 물론, 다음 세 가지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독립신문 서재필 기록을 통한 ‘무궁화노래’의 윤치호 작사 확인 ②중앙대학교 안춘근(순흥 안씨)교수 발표 1904, 5년 필사 자료 3편의 위작 판명 ③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회의 결과 ‘윤치호 작사 확인’ 등의 성과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일부 흥산단과 좌파계열의 진영논리로 윤치호 자사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를 온전하게 인정하게 하는 데는 우선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더 면밀하고 자료와 해설로 설득을 기울여야 한다. 이 글 역시 이런 의도에서 그동안 작사자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자료임에도 전체적인 조명이 도외시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사위원회가 결성되기까지 얼마나 혼란이 격심했고, 그것의 해소가 얼마나 난문제였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조사자료집’이지 ‘조사결과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연하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를 위하여 사전에 기본 자료를 취합하여 위원회 위원들에게 제공한 것이지, 조사 결과를 수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사자료 중에 "내용이 현행 애국가와 동일한 者의 有無如何는 未詳임”(1쪽)이란 표현 등을 오해하여 "조사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하였다”는 등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제1쪽의 서문격의 글, ‘애국가화창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의 종류’,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총 54쪽의 프린트본(가리방)이다. 목차는 없고 1쪽부터 본 내용이다. 서문에서는 작사자 거론 5인을 적시하고 세 가지 설(說)을 제시하였다. 내용의 첫 문장은 "現行愛國歌作詞者로 論義 되고 있는 인물로는 尹致昊 安昌浩 崔炳憲 金仁湜 및 閔泳渙의 五人이고 또한 單獨作詞說, 合作說 및 改作說이 있다.”고 하였다. 합작설은 최병헌과 윤치호의 합작설이고, 개작설은 민영환의 작사를 김인식이 개작하였고, 그 후 안창호가 또다시 개작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개작설을 제기했데, 주요한과 이광수의 주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시기에 안창호가 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때 거론된 인물은 5인이고, 이들 대상의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 세 가지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문헌과 신문 소재 애국가 기록을 3쪽에 걸쳐 인용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악고’편에 광무4년 군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고 한 기록을 인용하였다. 한국법전 제2장 ‘의식’편에 1908년 애국가를 연주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와 그리스도신문(2회 인용)에 애국가와 황실가를 화창 또는 제창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전자는 8회, 후자는 2회 인용하였다. 문헌과 증언이 뒤석여 있다. 애국가의 종류 "애국가의 종류가 많았던 모양으로”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보를 인용하고, 김양선 목사와 장지영과 최남선의 증언을 수록했다. 애국가와 무궁화가와 국가 세 종류를 제시했다. 특히 1902년 학부(學部) 제정 에케르트 작곡 ‘대한제국애국가’와 관련한 기록과 위의 세 분의 증언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가사 일부도 제시했다. 시선을 모으는 것은 이를 ‘애국가’가 아닌 ‘國歌’로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현행 애국가를 ‘국가’는 이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있었음을 알게 한다. 작사설 서론에서 밝힌 5인에 관련한 작사설을 1955년 5월 13일 이전까지의 신문 기사와 증언 등을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민영환(2/1쪽), 안창호작사설(3쪽), 김인식작사설(1쪽), 최병헌작사설(1쪽), 윤치호작사설(6쪽) 순으로 관련설을 취합하였다. 윤치호 항목은 가장 많은 내용을 담았다. 이 윤치호설은 앞의 4인에서 제기한 설과 교차 검증을 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항목에 대해서는 다시 집중 분석을 하기로 한다. 부록 증보문헌비고와 한국법전 수록 애국가 기록과 독립신문 투고로 게재된 애국가 18편, 대한메일신보 잡보란 수록 무궁화가 2편과 애국가 수록되었다. 그리고 황성신문 ‘國歌調音’ 기사와 ‘대한제국애국가’ 가사를 수록했다, 단행본으로는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본 창가책 인용 애국가를 수록하고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에서 애국가(찬미가 제1장), 현 애국가 가사를 인용하였다. 한편 서북학회보 ‘西友’에서 "학부에서는 애국가 통일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위원 중에는 학부협판 윤치호의 이름도 있다.”를 인용하였다. 참고문헌 목록 21종의 참고문헌을 기록했다. 완조실록(王朝實錄-고종·순종 실기와 승정원 비서원, 규장각일기), 관보, 공사관기록, 독립신문 외 4종, 한국통사, 대한자강회보 외 2종 유년필독(幼年必讀 왜정시대 압수 책) 그리고 조선고가요집(朝鮮古歌謠集 손진태 편)이다. 의외인 것은 무가(巫歌)를 모은 ‘조선고가요집’이다. 이 시기 애국가를 수록한 해방 직후 발행의 노래책이 10여 종에 이르는데도, 이 같은 관계가 없는 무가집을 참고자료로 포함시켰다는 것은 위원회의 무성의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5인에 대한 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들을 5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 중에 작사설 항목은 이 자료집의 핵심 주제로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영환부터 윤치호 작사설까지 살피기로 한다. 1. 민영환 작사설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작사설은 두 사람의 증언에서 제기되었다. 장도빈(1888~1963)과 김동욱의 증언인데, 전자는 역사학자로 서울신문 1955년 4월 16일 자에 밝힌 내용이다. "거금 47, 8년 전 학생시대에 이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불렀다. 민영환 작이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1908년에 들었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부정확하다. 현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기에 들었던 시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영환 작사로 거론된 것은 1902년 학부에서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이다. 그러므로 장도빈은 현 애국가와 ‘대한제국애국가’를 혼동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언도 하였다. "당시에 안창호작 애국가를 여러 번 들은 일이 있는데 현행 애국가는 아니었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안창호작’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거국가’인지 아니면 1908년 2월호 태극학보 ‘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찬 愛國歌’인지, 또 아니면 신한민보 1910년 10월 12일 자 기사 ‘大韓魂’에 포함된 ‘애국가’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안창호 작사 애국가가 있을 수 있음을 유념하게 하는 동시에 현 애국가는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해 준 것이다. 김동욱의 증언은 출전이 없다. 조사자료를 꾸미는 과정에서 취합한 증언인듯하다. 당시 86세로 "기미년에 윤치호씨와 더불어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자는 민영환에 틀림없다”(8쪽)라고 하였다. 이 증언 역시 1902년 작곡된 ‘대한제국애국가’와 혼동한 듯하다. 이런 오해의 배경은 이 애국가 악보 서문에 "大師府會計局總長陸軍副將 正一品勳一等 閔泳煥”으로 되어있기 때문인 듯하다. 2. 안창호 작사설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작사설은 매우 관심을 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 조사를 하게 한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다. 먼저 두 가지 출전이 제시되었다. ‘도산안창호’(1947. 5 30 刊)와 ‘도산안창호웅변전집’(1950 5 20 刊)으로, 여기에서 네 단락을 인용하였다. ①"도산이 상해 임정시대에 현행 애국가 가사 중 ‘임금을 섬기며’ 부분을 ‘충성을 다하야’로 修正하였다.” ②"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넓리 불려져서 국가를 代身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自己의 作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云云” ③"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고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對答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하지 않았다. 云云” ④"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 十篇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가장 잘 된 作品이라 云云” 이상의 네 가지 주장은 모두 1947년 중반에 발행된 이광수가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것이 안창호설의 한계이기도 한데, 관련 자료들 간의 교차 검증을 하면 다음과 같다. ①은 ‘신한청년’ 창간호에 게재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되어 나오니, 이를 안창호가 수정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 단 수정 시점이 창간호 발행 시점인 1919년 12월 이전이라는 단서가 충족되어야 한다. ②와 ③은 같은 맥락의 증언이다. 이 문제는 안창호가 언제 작사했는가와 왜 자신이 작사했으면서 이 사실을 숨겨야 하느냐 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기된 안창호 작사 시기는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 윤치호 교장에게 안창호가 지은 것을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얻어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윤치호가 애국가(찬미가 제14장)를 1908년 6월 25일 발행한 역술 <찬미가>에 수록한 이후라는 문제가 확인된다. 여기에다 "왜 자신이 작사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안창호의 겸양 때문이다” 또는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하여 널리 전파시키려는 의도에서다”라는 등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반론이 있는 상태이다. 그 하나가 조사보고서가 나오기 직전인 1955년 4월호 ‘신앙생활’에 밝힌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의 강력한 반론이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원작자를 밝히지 아니했을까? 일제 압박 하에서 윤선생(윤치호)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도산 안창호>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사자료에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은 이광수의 두 번째 부인 허연숙(許英肅, 1897~1975)이 1955년 4월 20일 자 자유신문에 증언한 것으로, 윤치호의 딸이 이에 대해 問議해와 이광수가 설명하여 해득시켜 보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와는 상반된 증언이 있다. 윤치호 작사설 자료에 수록된 주영환(朱榮煥)의 서면 증언이다. "이광수의 도산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 씨라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출판 후 춘원은 안영자 씨를 통하야 訂正할 기회를 만들기로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광수는 반민족행위특별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등 수난을 당하다 6,25 전쟁 혼란 와중에 납북을 당했다. 이런 상황임으로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수정할 수 없는 처지를 말한 것이다. 이로서 안창호의 가장 중요한 증언은 윤치호 딸의 오류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증거력이 상쇄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가족이나 친지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반드시 교차 검증을 거쳐야 한다. 안창호 측은 허영숙의 증언만을 거론하나 이 같은 대비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전기소설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인데, 앞장 ‘도산 안창호’의 해악(害惡)‘에서 밝혔듯이 이 ‘도산 안창호’는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이미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라는 점이다. 되풀이하지만 이광수의 글이라면 이렇게 파편적이고 탈맥락적일 수가 없는 데다 ‘살아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 내용이 생략된 사실에서와 같이 편집과정에서 가필과 삭제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어서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의 중장이 있다. 조사자료에는 두 가지 증언을 수록했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제기한 것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는 상해에서 안창호가 ‘임금을 섬기세’를 ‘충성을 다하여’로 改作을 하였을 때 자신에게 問議(9쪽)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 같은 조사자료 같은 항목에서 최남선이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11쪽)이라고 지적을 하였다. 이는 주요한의 나이가 20세라는 점으로 보아 최남선의 지적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원(金東元)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다. 그 내용은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의 ‘성자신손’(무궁화노래)을 ‘동해물과 백두산이’(애국가)로 개작하였다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선 여러 편의 글에서 밝혔듯이 대성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윤치호는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함에서 이런 주장은 원천적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는 낭설인 것이다. 다음은 최일봉(崔日鳳)이 서면(書面)으로 제출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의주 강연에서 안창호가 자기가 지었다는 "애국가를 배워주었다 云云”이라고 한 부분이다. 또 하나는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안창호가 임정시절 내무총장 비서실에서 "이유필(李裕弼) 입회하에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는 내가 창작자야 하고 언명하였다. 云云”한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이의 진정성은 의문이 된다. 그리고 후자는 안창호설의 상투적인 주장이라 위의 김인서 목사 주장으로 답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영숙 씨의 증언을 살핀다. 두 가지를 인용했다. 하나는 ‘도산안창호’의 내용에 대해 윤치호 측에서 이광수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득하고 돌아갔다는 것과 자신이 진명학교 시절 김인식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고 하며 "도산이 作詞하야 愛蘭 민요곡을 부쳐서 부르다가 김인식 씨가 음악가로서 名聲이 있었으므로 作曲을 부탁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전자는 앞에서 교차 검증을 통해 살핀 바와 같고, 후자는 문맥상 애매하여 논의 할 필요를 갖지 못하나 김인식설의 배경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김인식 작사설 음악교육가 김인식(金仁湜, 1885~1963)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를 조사하게 되었을 때 크게 관심을 둔 인물이다. 직접 직원이 방문하여 증언을 청취하기도 했고,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 1935~)이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점에서 인데, 하나는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여러 학교와 기관에서 지도한 음악가이고, 둘은 1955년 당시 작사설 거론자 중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에서다. 그의 활동은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의 초기 상황에서 종횡한 음악가이다. 김인식은 1896년 감리교에서 경영하던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고, 그 뒤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부인인 헌트(Hunt)와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교장 스눅(Snook)에게서 성악·오르간·악전을 배웠다. 이후 바이올린과 코넷까지 배웠는데, 오르간 연주는 뛰어나 숭실중학 3학년 때 1학년 음악수업을 맡을 정도였다. 1907년 미국 유학 준비차 상경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음악지도를 요청받고 교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부설 상동청년학원 중학부에서 서양음악을 지도하는 한편, 진명(進明)·오성(五星)·경신(儆新)·배재(培材) 등 여러 사립학교에서도 서양음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런 활동상에서 애국가 작사설의 인물로 시선을 끌만 하였다. 조사자료에는 1908년에 진명여학교 창립기념에 쓰기 위해 ‘애국가’란 제목으로 작사를 하였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박서양(경성합창단 단원)이란 학생이 부르는 ‘성자신손~ 운운’하는 "皇室歌(作者不明)를 듣고 이것에서 힌트를 얻어 작사·작곡을 하여 기념식에서 불렀고, 그 후 기호학교에서도 가리쳤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7년 후에 작고하였음에도 작사자로 제외가 되었다. 이에 대한 사정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1998년 발간한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상술하였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1907년을 전후한 당시 윤치호와는 YMCA 활동과 한영서원 하기 음악강습 교사 활동, 그리고 종교교회와의 관련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는 점. 둘째, 1910년 경신학교 교사 재직 시 <보중친목회회보> 창간호에 발표한 <애국가>가 무궁화가 가사에 자신이 작사한 것을 더하여 ‘올드랭 사인’곡으로 발표하며 ‘김인식 작사’로 한 바가 있다. 이것이 현 애국가가 아니라는 점. 셋째, 이 같은 사실을 생존 시에 밝히지 않았다는 점. 넷째, 작사자조사위원회의 출석 증언 요청을 거부하였다는 점. 마지막은 남긴 일기에 "찬송가에 손을 얹고 작사하였다”라고 하였지만, 그 일기를 쓴 일자가 작사자 조사 직후라는 점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외 김인식설에는 김한규 고유상 홍만유, 그리고 당시 진명여학교 학생 3인의 증언도 있다. 이는 모두 ‘김인식 작사’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고, 김인식 작사의 다른 작품들과의 혼동에서 결과한 것이다. 한편 증언자 중 출판인 회동서관(淮東書館) 사장 고유상(高裕相)이 관심을 끌지만, "김인식 작 창가책 소형이 있었다”는 단순한 증언일 뿐이었다. 실제 김인식 명의의 악보집과 창가책과 악전(樂典)이 있지만 거기에 애국가는 들어있지 않았다. 여기서 김인식 작사로 발표된 애국가(KOREA)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국가>(KOREA)는 8·6조 시형에 곡조는 ‘올드 랭 사인’이다. 이는 현 애국가와 같은데, 노랫말을 의외로 두 부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一 華麗江山東半島는 우리本國이오 稟質됴흔檀君子孫 우리國民일셰 無窮花三千里 華麗江 大韓사람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셰(후렴) 二 愛國하는 義氣熱誠 白頭山과 갓고 忠君하는 一片丹心 東海갓치깁다 三 二千萬人오직한마암 나라사랑하야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을다하셰 四 우리나라우리皇上 皇天이도으샤 萬民同樂萬萬歲에 泰平獨立하셰 총 4절에서 1, 2절은 김인식 작사이고, 3, 4절은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3, 4절이다. 이 1, 2절을 언제 작사하여 재구성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윤치호가 ‘찬미가 제14장’(현 애국가)을 작사한 1907년 중반 이전이라고 보게 된다. 이는 다시 밝히겠지만 화가 김은호의 회고록 ‘書畫百年’에 윤치호 작사 증언 부분에서 김인식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 <애국가>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승된 것이 확인된다. ‘예술통신’ 1947년 2월 10일 자 ‘愛國歌 其二’로 나오는 것은 물론 몇몇 필사본에도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정황에서 확인하듯이 김인식은 당시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인물이었다. 분명하게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궁화가’에다 가사를 더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이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증언을 거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음악가로서, 생존 인물로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4. 최병헌 작사설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은 애국가의 본문은 최병헌의 ‘불변가’에서, 후렴구는 윤치호의 '황실가'(무궁화가)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소위 ‘윤치호·최병헌 공동작사설’의 인물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최병헌 항목에는 최황(崔晃) 등 가족 2인의 명의로 제출한 자료가 요약되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1905, 6년 경 정동 자택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작사했다. ②윤치호와는 독립협회 때부터 친교, ‘황실가’ 후렴을 빌려 ‘하나님이 보호하사’ 애국가를 작사했다. ③윤치호는 기독교인이 아님으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 ④윤치호는 최병헌의 권유(勸誘)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작고 28년 후의 후손들이 제출한 자료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③과 ④같은 내용은 어불성설이다. 윤치호는 최초의 감리교 세례교인으로 최병헌 보다 입교가 12년이 앞선다. 최남선이 이를 교정시켜 주었다. 윤치호가 독립협회 회장 시기 최병헌은 주사직에 있었다. 가족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다. 이를 견준다면 앞의 두 가지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신흥우(申興雨, 1883~1959)의 증언도 있다. 12세 때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사상과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청년부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소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후 위의 인물들과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를 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영어 실력이 출중하여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한 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법률학을 공부했다. 1911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년 만인 1912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을 하려 했다. 이에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YMCA 이사가 되고, 배재학당 교장을 맡았다. 이상과 같은 이력에서 작사자에 대한 코멘트를 할 만한 동시대 지식인임은 분명하다. 조사자료에는 자신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정초식에 14세로 참가하여 ‘독립가’와 ‘진보가’를 불렀다고 하였으며, 작사자에 대해 이런 증언을 하였다. "1903년부터 1911년까지 滯美 中에는 안창호작이라 들었고, 귀국 후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들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가 발행된 시기 직후 미국과 하와이에서는 신한민보 등에서 애국가 또는 ‘국민가’(동일 가사)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표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에 가치를 둔다면 1910년 전후 미국에서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5. 윤치호 작사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교육자·정치가·저술가·개신교 운동가·계몽 운동가·언론인·독립협회·만민공동회·신민회·청년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다.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한 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운동, 민권운동, 의회설립운동을 벌이고, 황제에게 불충(不忠)하는 역적으로 취급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제경찰의 미행과 내사 등을 견디지 못해 친일로 전향하였다. 애국가 작사 문제는 문헌과 증언과 상황이 확정에 이르는 단계이지만, 친일 프레임에 발목을 잡혀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작사설 항목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네 개의 그룹인데, 하나는 한영서원 제자들의 증언, 둘은 가족의 주장, 셋은 지인들의 주장, 넷은 평론가 또는 제3자의 증언이다. 이제 각 측의 주장과 앞의 네 작사설을 교차검증하여 증거 자료의 가치를 확인하기로 한다. 한영서원 제자 신영순(申永淳) 외 3인의 증언이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우선 ‘特別讚美歌集’ 즉, 초판 ‘찬미가’의 존재를 알려 준 것으로 의미가 크다. "제1장이 국가(영민요곡), 제2장이 황실가(영민요곡)이고, 그 다음이 독립가와 신병가 등이었는데, 곡조는 찬송가 곡이었다”라고 하여 재판과는 다른 편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첫째 제1장이 국가(KOREA), 제2장이 황실가로 편제된 점, 둘째 재판 ‘찬미가’에 없는 찬송가 곡조의 ‘독립가’와 ‘신병가’가 수록된 점, 셋째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 이상의 세 가지를 들어 재판과 다른 초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아 작사 시점이 1907년이란 점을 보강해주기도 한다. ‘찬미가’ 초판은 1906년 10월 ‘한영서원(韓英書院)’ 개교 첫 입학생 14명에게 배포하기 위해 소규모로 출판을 했고, 1907년 작사한 현 애국가 외 2편의 ‘애국적 찬미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포함하여 재판을 1908년 6월에 발행하였다. 이의 존재를 바로 한영서원 학생들의 체험적인 직접증언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어서 1913년 "창가를 수집하여 비밀로 노래책을 출판하였다가 투옥되고 압수를 당했는데. 제1권 제1장 ‘애국가’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명기 되었다”라는 증언도 있다. 이 창가집의 실물이 없어 사실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노래책에 대한 ‘창가책사건’ 관련 기록에는 ‘윤치호 작 애국가’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실로 받아드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최규남의 증언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9세로 한영서원 다닐 때의 경험을 진술한 것인데, "한영서원 벽장문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지금의 애국가를 붓으로 써 부치고 선생 朴嶼陽(강화출신)씨가 우리에게 가리켜주며 이것은 윤원장(윤치호)이 만드신 것이라고 수차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제자 김동성도 50년 전부터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며 "학생들은 매일 아침 윤선생(윤치호)이 만든 애국가를 불렀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두 명의 또 다른 제자는 ‘唱歌集’과 ‘讚美歌冊’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혼동을 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다른 인물들의 작사설과는 다른 전문가의 증언이 있다. 박은용과 주영환이다. 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은 동아일보 1948년 10월 6일 자 ‘愛國歌考’에서 윤치호가 1945년에 남긴 ‘자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통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 주장은 1947년 발행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오류를 이미 7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좌익계 음악평론가의 이 질타는 친일파 척결이라는 첨예한 시점에서 시류에 따라 안창호가 민족지도자라는 이유로 애국가 작사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것이다. 주영환(朱榮煥)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주장했다. 하나는 기자협회보 3호에 서정주가 쓴 ‘청년 이승만’에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口傳을 받은 筆記”에 근거하여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한 사실, 둘은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에 현 애국가가 수록되었다는 점, 셋은 윤치호 자손이 이광수에게 정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이 세 번째는 앞의 안창호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증언을 상쇄시키는 것으로 의미가 큰 증언이다. 윤치호작사설에 특이한 두 인물의 주장도 있다. 백락준과 최남선으로, 백락준(白樂濬, 1895~1985)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주관한 문교부 전임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증언은 서울신문에서 밝힌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자신이 윤치호로부터 직접 받은 ‘찬미가’를 통해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찬미가’를 6.25 때 분실했다고 하였다. 당시 조사위원회에서는 이 책을 찾는다는 기사를 낼 정도로 결정적인 증거력을 지닌 자료였다. 최남선의 증언은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한 증언이다. 윤치호 가족 측에서 1945년 작성한 ‘자필 가사지’의 ‘一九0七年 尹致昊 作’ 표기 문제, 철자법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이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다. "<一九0七 尹致昊作>이 眞이라면 윤 씨 작이라 하여도 無妨할 것이다” ‘1907년 윤치호 작’이란 표기는 가사를 쓴 시점이 아니라 작사를 한 시점을 밝힌 것이기에 서법에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윤치호가 이른 시기에 어문법에 관심을 보인 인물임으로 역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자필 가사지’가 윤치호가 직접 쓴 진적(眞籍)이라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이 최남선의 증언은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유지된 기조이다. 첨언한다면 최남선은 조사자료 ‘애국가의 종류’에서 ‘대한제국애국가’와 현 애국가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혀 전문가적인 소견을 피력한 인물이다. 윤치호작사설 주장의 의미 있는 그룹은 윤치호 가족들이다. 사위 정광현, 이복 동생 윤치왕이 그들이다.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윤치호의 셋째 사위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기간 두 번에 걸쳐 의견서를 제출할 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한 가족 일원이다. 조사자료에는 ‘찬미가’ 재판의 존재를 제시하고, 1945년 작성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佐翁 筆跡의 애국가는 1945년 作故하기 전에 가족들의 請으로 讚美歌集에서 베낀 것이다. 謄寫할 때 綴字法도 多少 고치고 또한 ‘임금을 섬기며’의 句는 이미 改作한 것이라 하야 現 歌詞로 고쳐 썼다.” 윤치호 작사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증거력이 큰 사료인 ‘자필 가사지’의 작성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청에 의해 기념으로 남긴 것이란 사실을 밝힌 것이다. 더불어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중 "님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이유에 대해 가족들이 바뀐 부분 대로 쓸 것을 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서 <찬미가> 제14장과 차이나는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윤치왕은 1907년 "애국가 ‘백두산이’(영국민요)를 지어 학교에서 부르고 소책자로 박어서 분배”했다고 ‘찬미가’의 존재를 증언했다. 이상에서 살핀 5인에 대한 작사설을 조사하기 위해 작성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를 분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이 조사자료는 1955년 4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로 촉발되어 5월 13일 자료집을 발간하고 조사가 시작되어 1956년 8월 31일 최종회의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는데 활용하였다. ②작사자로 거론된 인물은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5인이며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이 있었다. ③주요 내용은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 부록, 참고문헌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각 작사설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민영환 설은 1902년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1916) 작곡 ‘대한제국애국가’ 악보집 서문에 이름이 올라있는 것에 대한 오해로 비롯되었다. 최병헌 설은 ‘불변가’라는 시에서 남산을 본 감상을 더해 작사했다고 하나 이 원작은 확인이 되지 않아 가족들이 제기한 설일 뿐이다. 음악가 김인식의 작사설은 윤치호의 ‘무궁화가’ 3,4절에 자신이 지은 1, 2절을 구성해 1910년 발표한 ‘愛國歌’(KOREA)를 오해한 제자들 유포한 설에이를 철회하지 못한 본인이 주장한 설이다. 안창호 설은 이광수가 지은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로 윤치호가 교장으로 왔을 때 안창호가 지은 현 애국가를 보여주고 양해를 받아 발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양해를 얻었다는 시점이 이미 윤치호가 작사하여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간한 이후여서 시점이 문제가 된다. ‘찬미가’가 발행된 것은 3개월 전이 1908년 6월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피소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데, 바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사의 탈맥락상과 연동이 되는 것으로 안창호 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 역시 대성학교 학생들과 임시정부 관련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설인 것이다. 윤치호 설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만으로도 작사 사실을 확정할만하다. 홍색 표지의 초판과 재판 역술 ‘찬미가’가 제시되었고, 1945년 작성된 ‘자필 가사지’까지 제시되었다. 또한 한영서원 제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있고, 가족들의 확신으로 자료가 제시된으로서 작사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거론한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활을 하여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 한 두 가지의 자료만으로는 그 진실을 주장하기에 부족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증거자료와 증언의 부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는 거의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1년 6개월간의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회의는 이 자료집에서 제시한 윤치호 관련 자료와 증언의 교차검증 과정이기도 하였다.(물론 조사과정에서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치호 작’ 자료 등 확인) 이런 점에서 이 자료집은 윤치호 작사 사실을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자료집이었던 셈이다.
-
무세중과 전위예술(3) <BR>巫世衆-그의 명인(嗚咽)과 몸부림 통일을 위한 <br>'통·막·살'(1편)國際演劇學會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9월 독일에 갔을 때, 西베를린에서 무세중씨를 만났다. 5년전 블루진 차림으로 특색을 짊어지고 독일 간다고 德成女大 내 研究室을 찾아왔을 때 나 는 그가 왜 떠나며,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떠나는 순간까지 그가 깊은 몸 암동에 있었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길에 그의 집에 자주 들렀고, 들을 때마다 술잔을 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집이 그때 정릉이요, 그의 집이 돈 나누며 허물없이 무엇이든 의논하고, 서로간에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多血質 성격과 비타 협적인 정신과 옹고집 때문에 그는 언제나 울분에 가득차 있었다. 그 울분은 우리 演劇이 改革 되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황때문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한극회」를 만들어 演劇改革 심포 지움을 개최했을 때 그는 몸을 던져 일을 했다. 演劇學會를 창립할 때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든 일이 우리 연극을 새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부터 연극에 미쳤고, 탈에 심취했고, 탈춤에 빠졌으며, 周易공부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은 그가 무엇에 얼마나 미쳐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演劇博物館이었다. 공부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수집했다. 경청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메모해 두고 녹음해 두었다. 불만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집어다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경지였다. 앞으로 얼마나 살려고, 또 얼마나 큰일을 하려고 이토록 법석을 떨며 수집하고, 카드를 작성하고, 노트에 열을 올리는지 나는 언제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왔느냐 하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이리뛰고 저리뛰며 살았는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의욕과 정열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는 그의 生과 예술의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歐美演 劇을 배우고, 歐美演劇의 최첨단과 부딪쳐 보자는 생각이 그에게 떠올랐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했다. 꽃이 만발한 德成女大 캠퍼스에서 나와 작별의 굳은 악수를 나누고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을 때, 내 말문이 막힌 것은 그가 가는 길이 얼마나 험악한 길인가를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했다. 그러나 한가지 희망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호주머니는 비어 있었지만 우리의 巫俗과 民俗의 귀중한 봇짐을 힘껏 짊어지고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맨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東洋의 하늘을 담고 가는 것이었다. 나의 불안을 해소해 준 유일한 위로는 이것뿐이었다. 그와 헤어진지 일년 쯤 지났을 때 나는 學會일로 서독 뮌헨에 갈 일이 생겼다. 그에게 연락해서 뮌헨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바람처럼 회의장에 나타났는데 예상한 대로 얼굴은 헬쓱하고 창백해져 있었고, 과로와 영양실조로 고생한 흔적이 역연해 보였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며 특히 허리에 통증을 느낀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탄산수를 사 마실 돈이 없어서, 마셔서는 안 되는 물을 마구 퍼마셨기 때문에 생긴 腸結石이 원인이었는데 치료비도 없고 해서 맥주를 마시며 結石을 씻어내렸다는 것이다.)그는 일정한 주거지도 없이 유럽 땅을 방랑하고 있었다. 오갈데가 없으면 무조건 전위극단을 찾아가서 탈춤을 가르쳐 주고 며칠씩 신세지곤 했다. 유럽 땅에 황혼이 깃들면 극심한 고독과 가난 때문에 매일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뮌헨을 떠나갔다. 귀국 후, 그로부터 간간이 편지가 날아왔다. 미국에도 가고, 유럽 땅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탈춤을 보여주고 가르치면서 생활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말끝마다 자기를 잊지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편지를 받아들면 언제나 눈물이 글썽해졌다. "죽일놈 돌아올 것이지." 그가 떠난 후 아이러니컬 하게도 우리나라에는 탈춤 붐이 일기 시작해서 이 곳에도 그가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어서 와서 그 일을 할 것이지. 나는 혼잣말로 중얼대곤 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버티어 나갔다. 3년이 지난 후, 그는 유랑생활에 매듭을 짓고 西베를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은 前衛藝術의 중심지이고, 그와 같은 유랑 藝術家들이 집결해 있는 곳이어서 그가 활동하기에는 이상적인 도시였을 것이다. 처음에 그는 그곳에서도 유명한 연극연구소(춤 중심의)에서 그가 새 로 연구한 '타이치'라는 춤을 가르치는 강사직을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춤을 출수있는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들 제자들을 거느리고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묵살당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고 꾸준히 그는 작품 발표회를 연달아 가졌다. 몰이해와 무관심으로 뒤범벅 된 1년간의 시련의 세월이 흐르자 베를린 前衛藝術界는 그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 다. 신문, 잡지와 텔리비젼에서 그의 공연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가들이 그의 공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프-베를린의 화제가 되기 시작했고 그의 공연 예고는 신문, 잡지의 톱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의 공연을 격찬하는 비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작년 9월 베를린에서 그를 만났을 때 첫째로 놀란 것은 빨간 小型自動車를 직접 몰고 왔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그가 安住하는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으며, 셋째로 놀란 점은 전속극단과 전용 소극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도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구나 하는 것이 나의 충격적인 감동이었다. 몸은 군살이 빠져 단단해 보였고, 머리는 새둥지 같은 산발이었으며, 복장은 히피를 뺨칠 정도였으나, 눈동자만은 狂氣에 빛나고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 "李兄, 아르또를 읽고 있소?"였다. 그의 모습도 아르또와 비슷해서 놀랐지만, 나의 진정한 놀라움은 그가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집으로 가서 그가 성취한 50여 편의 공연기록 스크랩북을 뒤적이면서 나는 "드디어 해냈구나!"하는 감격의 순간을 되씹고 있었다. 그는 詩를 쓰고 있었다. 그 詩를 그의 공연파트너인 구순이씨(이 극단의 유일한 한국인 여자 연기자이다. 이번 '통·막·살'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韓했다)가 독일어로 번역한다. 그 詩를 옮고 감상하는 명상의 시간으로부터 그의 공연연습은 시작된다. 그 속에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져 있다. 그 속에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채 힘이 담겨져 있다. 그 詩 속에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정감이 깃들어 있다. 무대의 긴 마루 바닥에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있는 꽃들은 그의 詩를 통해 무대적 창조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런 다음 그들은 격렬한 연습의 시간으로 뛰어든다. 무세중씨가 50%를 던지고, 풀가 나머지 50%를 추가해서 한편의 공연이 완성된다. 이같은 集團創作을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충돌과 대화와 토론이 벌어진다. 공연장 무대는 긴 구형의 마루바닥이다. 양쪽 끝에 천정까지 와 닿는 커튼이 쳐져 있어 호리존트 구실을 하고 있다. 관객들은 공연장 무대 속 어느 곳에 앉아도 된다. 양쪽 흐리존트에 추상화를 방불케 하는 슬라이드가 비친다. 등신대의 人形이 그 앞에 놓여있다. 배우들은 알몸이 되어 출연한다. 그들의 동작과 춤은 하리만큼 충격적이면서도 무한히 아름답다. 북소리, 징소리, 기타 소리, 강석희의 음악소리, 피에르의 노래소리, 신음소리, 고함소리, 이 모든 소리와 빛과 움직임이 한가지 主題속에 調和를 이루어 관객을 자극시켜 무대속으로 끌어들인다. 소회에 관한 토론을 벌인다. 무세중씨는 民族分斷의 아픔을 그 곳에서도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소원하는 작업은 과거의 베틀린 역-현재는 역이 된 채 버려져 있는 이 공간에서 통일을 주제로 한 일대 野外 해프닝劇을 시도하는 일이었으며, 故國에 돌아가 똑같은 발상으로 섬진강변에서 統一을 기원하는 살풀이를 한마당 펼쳐보는 일이었다. 이 같은 구상이 변용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이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금년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공연된 '友, 그리고 통·막·살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1982년)이었다.
-
조선 첫 의병장 양달사 장군, 표준영정 초본 제작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梁達泗, 1518∼1557년) 장군의 정부 표준영정 초본(抄本)이 나왔다. 정부 표준영정은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민족적 추앙을 받는 선현의 영정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지정한 초상화를 말한다. 8일 영암군에 따르면 공개된 양달사 영정 초본은 높이 180㎝, 너비 155㎝ 규격의 서 있는 모습으로 조선 무신의 공식 복장인 철릭을 입고, 지휘봉인 등채를 들었다. 영정 복식은 고영 한복문화연구원 대표의 자문과 양달사현창사업회 등 국내 학계의 학술 고증, 정조 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창운(李昌運) 초상의 무관 군복 양식을 두루 참고했다. 얼굴 등의 용모는 후손 70여 명을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해 골격과 인상의 특질들을 반영했다. 양달사 의병장의 정부 표준영정 작업은 동국대 명예교수인 손연칠 작가가 맡았으며, 총 제작기간은 10개월이고 문화관광체육부 심의를 거쳐서 오는 8월 확정된다. 양달사 의병장은 1537년(중종) 무과, 1546년(명종) 중시에 합격해 전라 좌우 우후와 진해현감을 역임했다. 1553년(명종)에 남해 현감 부임 중 모친상으로 시묘(侍墓)살이에 들어갔는데 을묘왜변이 발발하자 활약한 조선 최초 의병장이다.당시 70여 척의 배를 타고 전남 영암에 침입한 왜구에 의해 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했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항복하면서 10개 성이 잇달아 함락됐다. 양달사 장군은 영암군민과 여러 지역에서 피난 온 유민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고 1555년 음력 5월 25일 오전 영암향교 앞에서 광대패인 '창우대'에게 굿판을 벌이게 한 다음 왜구들이 방심한 틈을 타 급습해 대승을 거뒀다. 이후 전라도 유생들은 장군의 신원에 대한 탄원을 끊임없이 제기했고, 선조는 장군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영참찬관으로 추증했다. 1974년 6월 24일 허련 전남도지사가 장군의 묘지 앞에 순국비를 건립했고, 2019년 양달사현창사업회가 창립됐다. 영암군은 2023년 '남암공 양달사 문헌집'을, 영암교육지원청은 동화책 '나라를 구한 의병장 양달사'를 발간했다. 지난해부터는 양달사 장군을 기리기 위해 영암성대첩 기념식도 열고 있다. 국가표준영정 제작을 주도해온 영암군은 문체부의 지정에 맞춰 양달사현창사업회, 제주양씨주부공파 문중과 협의한 다음 군민 참여 속에 영정 봉안식을 개최할 계획이다.
-
이무성 화백의 춤새 (81)<br>박병천 명인의 '진도북춤' 춤사위진도북춤 진도북춤은 전남 진도 지역에서 양손에 채를 쥐고 추는 춤으로, ‘진도북놀이’라고도 일컫는다. 군무를 중심으로 북을 메고 추는 춤을 '북놀이'라 하고 독무를 중심으로 북을 메고 추는 춤을 '북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진도의 북은 양손에 채를 쥐고 친다고 하여 흔히 ‘양북’이라고도 하고, 채를 쌍으로 들고 춘다고 해서 ‘쌍북’이라고도 한다. 혹은 어깨에 메고 친다고 하여 ‘걸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대개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양손에 채를 쥐고 친다는 의미의 ‘양북’이라는 용어로 통칭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김행원(진도 출신, 김득수의 아버지)이 북춤이 뛰어나 호남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다고 전해진다. 1980~1990년대 양태옥이나 박관용의 경우, 소리북을 메고 북춤을 추기도 했다. 북춤을 출 때 고깔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후 변화를 겪으면서, 특히 박병천 등에 의해 상투머리를 하기도 했다. 1984년 2월 16일에는 진도북놀이보존회가 창립되었다. 1987년 전라남도 지정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면서 진도북춤의 양식이 정형화 되기 시작했다. 발표회를 통해 진도북춤이 점차 무대화된다. 또한 장성천, 양태옥, 박관용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유파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박병천은 북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집(코리아하우스) 악장 시절에 진도의 기교적 춤사위를 곁들인 진도북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 안무하고 재창조한 북춤을 내놓았다. 이 ‘박병천류 진도북춤’은 원래 농악판에서 놀아졌던 북놀이였지만, 그 가락과 춤사위를 다듬고 또한 무대형식으로 승화시켜 무용예술이 된 것이다. 박병천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서 박범준과 김소심의 2남 3녀 중 넷째(차남)로 태어나 74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집안은 진도 세습당골 명가로, 조부는 대금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가계에서 성장한 그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집안 어른들 밑에서 어정(굿)판을 따라 다니며 악가무를 익혔고, 7세 때에는 마을 농악판 무동으로 활동하면서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18세부터는 판소리 명인 박동준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30세에는 호남춤의 명무 이매방에게 전통무용을 배우기도 하였다. 뿌리깊은 당골집안의 후예답게 천부적인 재능을 배경으로 악가무 명인이 되었다. 1981년 국제민속예술제 초청 유럽 6개국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1984년 LA올림픽 개막축제 공연, 1985년 베를린 국제민속음악제 국가대표 유럽 7개국 순회공연 등을 펼쳤다. 박병천 약력 진도 출생(朴秉千, 1933∼2007) 1952년 목포상선전문학교 졸업 1960년대 초 진도실업고등학교 농악강사 (사)민속놀이진흥회 이사장, 코리아하우스 악사장,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 대불대학교 국악과 석좌교수 1990년에는 LA 아·태지역 토속신앙 페스티벌 공연, 1994년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 공연 ‘진도씻김굿’ 미국 순회공연, 1999년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유형문화 전시·무형문화재 공연, 독일 세계문화의 집 초청공연, 2000년 DMZ-2000 백남준 비디오 씻김 공연지도 및 출연 2005년 러시아 나라음악 큰잔치 공연, 2006년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 기념공연, 2007년 한·베트남 수교 15주년 기념공연 음반 「박병천의 구음다스름」, 「한국의 슬픈 소리」, 「진도 씻김」, 「강강술래」
-
조선~대한제국기 조명기구와 궁궐 이야기, 보고서로 발간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시대·대한제국기 조명기구의 조사 결과를 수록한 『조명기구(照明器具)』와 숙종과 고종 연간에 각각 편찬된 『궁궐지(宮闕志)』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고문헌국역총서 『국역 궁궐지-숙종 연간』·『국역 궁궐지-고종 연간』(1건 2책)을 발간하였다.국립고궁박물관의 소장품 도록 제18책 『조명기구』는 조선시대 등잔대, 촛대, 좌등(座燈), 초롱(燭籠)·등롱(燈籠), 괘등(掛燈) 등 전통식 조명기구 43점과 개항 이후 유입되었던 서양식 촛대, 석유등, 전등기구 등 근대 조명기구 52점, 총 95점의 사진과 해설 등 기본 정보를 담았다. 이와 함께, 초·석유·전기 등 광원별로 유물을 구분하고 구조를 설명해 입체적으로 유물을 이해할 수 있으며, 조명기구가 그려진 의궤 등 문헌자료와 근대기 궁궐 사진에 나타난 조명기구의 모습을 함께 제시해 조명기구가 본래 사용되었던 장소와 용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특히, 샹들리에, 등갓, 조명 부속품 등 근대 조명기구 중에서 1900~1910년경에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창립한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ompany)’에서 제조한 이화문 샹들리에가 주목되는데, 표면의 황금색 안료와 전구를 끼우는 기구(소켓)에 새겨진 상표(마크), 당대에 발행된 신문 자료 등을 토대로 유입 초기인 1904년경 덕수궁 돈덕전 접견실 회랑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샹들리에 가지 덩굴마다 대한제국 황제의 문장(文章)인 이화문(李花文)이 장식되어 있어 주문 제작된 상품으로 보인다.이외에도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에 걸쳐 사용된 여러 조명기구에 대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과 논고도 도록에 함께 수록하였다.한편, 고문헌국역총서 제12책 『국역 궁궐지-숙종 연간』 및 『국역 궁궐지?고종 연간』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숙종 연간(1674~1720년)의 『궁궐지』(1건 1책)와 고종 연간(1863~1907년)에 편찬되었다고 추정하는 『궁궐지』(1건 2책)를 각각 국역한 것이다.숙종 연간에 편찬된 『궁궐지』는 1695년(숙종 21) 6월에 숙종이 직접 쓴 어제 서문(御製序文), 경복궁·창경궁·창덕궁·경덕궁(현 경희궁)·어의동궁 등 다섯 궁궐의 전각과 관련된 간략한 정보와 이를 기록한 기문(記文)·시문(詩文), 그리고 1696년(숙종 22)부터 1707년(숙종 33)까지의 기록을 보완한 부분으로 크게 구분된다.고종 연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궁궐지』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에 있는 전각의 규모, 위치, 칸수, 구조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훼철(毁撤)되어 없어진 궁궐 전각의 위치와 형태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향후 궁궐의 옛 모습을 복원하거나 재현하는 고증 자료이자 궁궐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발간된 책자는 국공립 도서관과 관련 연구기관 등에 배포할 예정이며,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누리집(www.gogung.go.kr)에 공개되어 있다.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앞으로도 정부혁신과 적극행정의 하나로 왕실 문화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여 조선시대 왕실 문화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공유해 나갈 것이다.
-
(29)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신용하의 음흉(陰凶)함신용하 교수의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설' 관련 글은 두 편이 있다. 첫 편은 ‘대한민국학술원통신’ 2018년 4월 1일자, 제297호에 발표한 ‘愛國歌 作詞는 누구의 작품인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2018년 4월 16자 통신사 ‘뉴시스’에 ‘애국가는 절대 도산 안창호의 작품일 수 없다’로 반박한 바 있다. 두 번째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2021년 08월 26일 발표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작사에 대하여’의 결과물이다.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 첫 머리에 수록된 원고로써 이번 비판의 대상이다. 신교수의 이번 글의 핵심은 안창호가 1907년 3월~1908년 9월 사이 작사했다는 주장이다. 나름의 근거를 들긴 하였다. 그러나 모두 필자에 의해 검토되어 용도 폐기된 것들의 조합 정도인데다, 한 건도 자신이 발굴한, 자신만의 해석을 가한 대목은 없다. 그런데도 강연을 하고, 10여년 이상 안창호 주장자들을 뒤로 밀고 첫 번째에 원고를 수록한 것은 흥사단이 ‘신용하’라는 권위와 명성을 이용한 것이고, 신교수는 이를 알면서도 응한 것으로 본다. 애국가 작사자를 이렇게 쉽게 진영논리로 밀어붙여서는 안된다는 인식에서, 신교수에게는 다소 지난친 감이 있지만 비판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첫 문장부터 가관이다. 신교수의 주장 배경이기도 하고, 상상력으로 구축한 가설이기도 하다. 이 가설로부터 전개 과정의 논지를 들어 비판하고, 결론으로 신교수의 간교함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해의 편이를 위해 주요 문제 대목을 인용하고 구체적으로 반박하기로 한다. #1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나라의 자주독립과 애국사상 배양에서 ‘애국가’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하고 애국계몽 운동가들과 지식인 학생들에게 애국가 제정과 제창을 적극 권장하였다.” 애국계몽운동가, 지식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애국가 제정과 제창을 적극 권장하였다.”고 전제하였다.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전제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어떤 기록을 통해 애국가 제정과 제창을 권장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이 이후에 제시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는 허위이다. 분명히 근거 없는 가설이다. 다만 귀국하면서 국가(애국가)에 대한 기능(상징조작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안창호가 국내 사정을 잘 몰랐던 데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독립신문은 이미 논설을 통해 이를 피력해 왔고, 지면을 통해서는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 등을 실천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는 안창호만의 인식은 아닌 것이다. 이의 증거가 ‘태극학보(太極學報)’ 1908년 3월 발행 제18호를 통해 발표한 ‘讚愛國歌’의 실체이다. 이를 통해 안창호는 이미 그 효용성을 발휘하고 있는 어떤 애국가를 찬(贊)하였기 때문이다. #2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이 ‘국가’로서 부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애국가’는 자료를 검증해본 결과 도산이 1907년 3월~1908년 9월 사이 작사한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이렇게 안창호가 귀국하면서부터 대성학교를 개교하는 시점에 한정하여 현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판단’하였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추정을 하였을 뿐이다. 사실 약 1년 반이라는 시기를 제시한 것이니 이 자체가 막연한 추측인 셈이다. 신교수는 이 상황은 이렇게 진전시킨다. 즉, 1907년 2월 20일 일본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후 3월 1일 균명학교 외 3개교 연석 귀국강연회에서 애국가에 대해 설했다는 것이다. 이를 각주(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자)로 제시하여 근거로 삼았다. #3 "國旗拜禮 西署 萬里峴 義務均明學校에서 去番 歸國하얏든 美國儒學生 安昌浩氏가 生徒에게 대하야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鐘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매일 上學전에 國旗에 拜禮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즉 其開明模範을 令人感昻이라. 然則 凡吾학교도 從今施行하자 하므로 該校에서 去月曜日로 爲始하야 拜旗唱歌禮를 擧行한다더라” 안창호가 귀국한지 한 달만에 학생들에게 첫 강연을 하였는데, 미국의 학교 상황으로 조회 때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국가)를 창함을 보고와서 권한 결과 균명학교에서 3월 18일 월요일 조회에서 "拜旗唱歌禮를 擧行한다더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교수는 ‘拜旗唱歌禮’를 국기 경례를 했는데 애국가는 부르지 못하고 애국적인 창가를 불렀다고 했다. 애국가와 창가를 구분하였다. 그 이유를 "아직 조선에서는 애국가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애국적 창가(唱歌)로 제창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미국학교에서 "國旗에 拜禮하고 愛國歌를 唱함”에 대한 강연 결과로 의무균명학교에서도 그대로 했다는 뜻으로 ‘拜旗唱歌禮’를 하였다는 것인데, 애국가가 정해져 있지 않아 다른 창가로 대신했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 상상이며 가공이다. 대성학교 개교(1908년 9월 26일) 전에는 현 애국가가 없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억지일 뿐이다. 특히 "아직 애국가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므로~”라는 표현도 터무니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1902년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가 관립학교와 국가적인 행사에서 연주된 데에다 교회 등에서도 여러 애국가를 부른 기록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정’이란 용어 사용도 전혀 학술적이지 못한데다 사실도 아니다. 왜냐하면 1908년 9월 이전에 "애국가”가 불렸음은 1907년 11월 14일 ‘황성기독교청년회관신건축 상량예식’ 식순에 ‘愛國歌’가 있음은 물론, 안창호가 강연자로 참석한 1907년 7월의 한 행사 기사에서 ‘애국가’의 존재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는 데서도 그렇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자 <女子敎育의 視察>이란 기사 일부이다. "광무 11년 7월 8일에 본지 명륜당 내에서 녀자교육연구회를 개하였는데 각학도는 방학의 시를 당하여 7, 8백 명이 참회(參會)하였고, 교회 부인 급 려염부인(閭閻婦人) 4, 5백은 서편으로 참석하였고 일반사회는 1천 8, 9백 명이 동편으로 방청하는데 대황제폐하 만세의 황태자전하 천세와 엄귀비전하(嚴貴妃殿下) 천세(千歲)를 삼호(三呼)한 후에 진명녀학교 생도는 애국가로 축사를 쟁창(爭唱)하고 차제로 열좌(列坐)한 후 부인 연설원은 황부인 몌례 씨와 금부인 혈넌씨와 12세 녀자 옥어진(玉於鎭) 씨요 남자 연설원은 안창호와 김희경인데 박수갈채함은 난가진언(難可盡言)이고…” 이 두 행사에서 불린 것이 어떤 애국가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에케르트 작곡 ‘大韓帝國愛國歌’이거나 현 애국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아직 애국가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므로”로라는 주장이나 1908년 9월 이전에는 현 애국가는 물론 "애국가”가 지정되지 않아 부를 수 없었다는 주장은 가당치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 단락에서 "1908년 8월까지 애국계몽기에 부른 애국가는 주로 ‘무궁화노래’라는 이름의 황실 찬양 중심의 다른 애국가였다.”라고 하여 이미 다른 "애국가”가 있었음을 시인하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신교수의 문해력을 의심하게 한다. 그리고 억지는 계속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4 "도산이 신민회를 1907년 4월 창립한 뒤, 이듬해 구국교육운동의 모범학교로 1908년 9월 26일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을 바로 이때 ‘애국가’의 문제가 대두 되었다. 도산이 새 ‘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창작 보급하기 시작하기 이전 1908년 8월까지 애국계몽기에 부른 애국가는 주로 ‘무궁화노래’라는 이름의 황실 찬양 중심의 다른 애국가였다.” 신교수의 #2에서 "도산이 1907년 3월~1908년 9월 사이 작사한 것”이란 주장에 이어, 안창호가 지어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에 발표하였다고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정리하면 지은 시기는 약 1년 반 동안, 이를 세상에 알린 것은 대성학교 개교 후라는 것이다. 그리고 작사 동기는 개교 이전에는 "황실 찬양 중심의 다른 애국가”만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새 애국가가 필요해서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현 애국가와 동일 후렴을 쓰는 ‘무궁화노래’(별칭 황실가)는 독립신문 1997년 7월 13일자에 서재필이 "계관시인 윤치호가 지은 것”이라고 한 사실을 수용하며, 현 애국가의 탄생(?)을 서사적으로 이렇게 기술하였다. 5# "대성학교 개교 직후 그(안창호)가 추대한 대성학교 교장 윤치호가 평양의 대성학교로 내려오자, 도산이 이전의 <애국가>(무궁화노래)는 황실 중심이어서 적당치 아니하므로 새로이 한 절을 지어보시라고 윤치호에게 요청하였다. 윤치호는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서 넣어 두었던 것을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유하사 우리나라만세’의 애국가였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 되었다고 찬성하여 대성학교에서(안창호 작사의) 새 가사의 애국가가 제창되기 시작하여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따라가다 보니 "증언이 있다.”로 끝났다. 이는 그동안 필자의 논증으로 전문(傳聞)에 전문으로 유포된 이야기를 답습한 내용이다. 신교수가 #2에서 "판단하고 있다.”를 가능케 한 것이 겨우 이런 ‘증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신교수 판단의 근거는 바로 인용한 5# 뿐인 것이된다. 이를 분절하여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현 애국가와 동일한 후렴의 ‘무궁화노래’를 작사한 윤치호가 교장이 평앙 대성학교 에 내려왔다. 둘은 안창호가 이미 자신이 지어 놓은 상태에서 황실찬양 내용의 애국가를 지은 윤치호에게 정당치 않으니 다시 지어달라고 하였다. 셋은 윤치호가 좋은 생각이 아니 난다고 하였다. 이에 안창호가 지어놓았던 애국가(현 애국가)를 보여 주니 윤치호가 좋다고 하였다. 넷은 윤치호의 찬성하에 안창호가 지은 것 현 애국가를 대성학교에서 보급하였다. 핵심은 1908년 9월에 안창호가 지은 것을 윤치호의 찬성하에 세상에 처음 알렸다는 점이다. 이상이 사실일까? 그렇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현 애국가 가사는 1908년 9월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당연히 대성학교 안창호의 서랍에서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신교수는 이런 사족(蛇足)을 달았다. #6 "새 애국가의 본 가사는 도산의 작품이지만 후렴은 ‘무궁화노래’의 후렴을 차용했음으로 도산은 새 애국가를 자기 작품으로 밝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애국가를 도산의 작품이 아니라 윤치호의 작품이라고 보는 견해도 나오게 된다고 본다.”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후렴을 차용하였기 때문에 안창호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역시 신교수의자신의 가설을 강화하는 주장인데, 이런 정도는 윤치호가 이미 1906년 10월 3일 한영서원 개교 후 입학생들을 위해 1907년에 들어 새로 작사했다는 증거인 ‘자필 가사지’의 존재를 대입하면 내세울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정도는 너무 궁색한 논지이다. 이어서 신교수는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이미 필자가 ‘찬미가’ 수록 3편의 창작 작품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주제 지향과 가사의 응결성’을 발표한 바가 있다. 이와 같이 애국가 가사와 안창호의 다른 작품과의 분석을 한 것인데, 2절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 1절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는 ‘東海’와 같은 시어, "바다가 변하여 돌이 된들”과 같은 영원성의 비유 등을 들어 공통점이 있으니 안창호 작품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비교 대상인 안창호 작품들의 출현 시기의 문제이다. 즉, 남이장군(南怡將軍) ‘북정가(北征歌)’의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나 유길준 ‘독립기념경절회창가’의 "장백산 높다해도~동해물 깊다해도”나 윤치호의 ‘찬미가’ 14장(현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출현 이후의 소작이란 문제다. 이 시기의 문제는 안창호의 비교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시어나 비유 등이 바로 앞서 열거한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다음 대목도 실효를 거둘 수 없음은 알게 한다. #7 "여러 사람의 증언들에 차이가 있을 때에는 작품의 내용 분석이 작가를 밝히는 좋은 방법이 된다. ‘동해문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애국가 가사의 내용과 표현을 다음과 같이 도산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보면, 이 애국가의 본 가사는 도산 작품임이 분명해진다.” 내용 분석을 통해 작가를 판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독창적인 노래 가사를 지었다고 해도 전 세대 또는 동시대의 다른 작품에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작가만의 독특한 핵심어의 대비가 아니고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신교수는 이러한 문제, 즉 작품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신교수가 애국가 가사와 안창호의 다른 작품과의 분석 결과 제시 정도로 작자를 규명 하려 했다면 옳은 방법은 아니다.문제는 작품의 외연과 내연을 관통하는 주제와 핵심어의 여부이다. 애국가 가사의 핵심어는 바로 ‘하느님’(하나님)이 된다. 필자는 앞장에서 현 애국가의 주제를 제1절 가사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들어 ‘충군 애국적 신앙’이라고 학인 한 바 있다. 그런데 안창호는 ‘하느님’을 쓴 바도 없고, 신앙고백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가사를 쓸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안창호는 이런 신앙적 표현을 어떤 노래, 아니 어떤 강연이나 담화에서도 하였다는 기록이나 증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단 하나의 핵심어 사용 여부로 안창호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다. 앞의 #1~#6까지의 신교수 주장도 결정적인 한 가지 증거로 전면 부정을 하게 된다. 아니 전복이 된다. 왜냐하면 "동해문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가사의 애국가는 이미 대성학교 개교 3개월 전인 1908년 6월 25일 광학서포에서 발간한 윤치호 역술 ‘찬미가’(재판) 15쪽 제14장 ‘Patriotic Hymn’에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신교수가 그렇게도 강조한 안창호가 지어놓았다가 윤치호의 찬성으로 1908년 9월에 서랍에서 꺼내 발표하였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사실 하나로 신교수의 너절한 주장은 허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으로 신교수는 알면서 숨긴 것이 있다는 점이다. 매우 충격적인데, 자신의 주장 시점보다 절대 시간 3개월이 빠른 기록 증거이다. 바로 ‘찬미가’ 수록 14편 ‘Patriotic Hymn’이다. 이는 결코 몰라서가 아니다. 존재를 알고 있었음이 자신의 글 곳곳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12쪽 "이 ‘무궁화노래’는 윤치호가 편찬한 ‘찬미가’에서 <Patriotic Hymn>(애국가)으로 번역해 수록~”이라고 한 것과 15쪽 각주7의 참고문헌 "① 尹致昊 譯述, 찬미가, 1908”로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20쪽 각주8은 결정적인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윤치호 ‘찬미가’(재판 1908년)에서 ‘무궁화가’의 영문 제목을 ‘애국가Patriotic Hymn’으로 번역한 것은 윤치호임이 분명함으로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그의 ‘애국가’는 이 ‘무궁화노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교수가 "그의 ‘애국가’는 이 ‘무궁화노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한 ‘무궁화가’는 ‘애국가Patriotic Hymn’이며, ‘찬미가’ 수록 제10장이며, 또한 ‘애국가Patriotic Hymn’ No[1]이기도 하다. 제10장의 ‘No[1]’이란 표기 의미는 제14장을 같은 ‘애국가Patriotic Hymn’ 두 번째, 즉 ‘No[2]’로 변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교수가 단 각주8의 논리대로 하면 제14장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그의 ‘애국가’는 이 제14장 ‘애국가Patriotic Hymn No[2]’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같은 곡조에, 같은 곡명을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교수는 스스로가 인정을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안창호가 끼어들 여지는 없게 된다. 3개월 전이란 절대 시점상으로나 ‘No[1]’이란 변별의 면밀함에서 윤치호 작이 아닐 수가 없게 된다. 신교수가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감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5 쪽에 수록된 ‘제14장’(현 애국가)의 존재를 왜 숨겼을까? 학술원 회원이란 권위로 자신의 가설(억지 주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강연료(원고료)를 받기 위해서? 하여튼 어떤 이유에서건 불리한 사안을 숨긴 것은 매우 음흉한 짓이 아닐 수 없다.
-
무세중과 전위예술(1) <BR>"전통과의 충돌"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 무세중은 한국의 전위예술가로, 1937년 김세중(金世中)의 몸을 빌려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과 충돌하고, 서구 공간과 충돌하고, 분단과 충돌하고, 체제와 충돌하고, 마침내 문명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 광산 김씨를 떼어버리고, 인민 ‘중(衆)’자로 바꾸어 무세중(巫世衆)이 되었다. 1960년대는 민족의 넋과 얼이 깃들어져 있는 민족예술의 시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그곳에서 민속극의 원천과 우리들의 몸짓과 춤사위를 발견하고 기록하며 봉산탈춤 (이근성), 양주 별산대 놀이(김성대 선생), 동래 들놀음 (박덕업), 남사당 덧뵈기 춤(남형우), 고성 오광대(장재봉) 춤을 익히고 전수 받아 한국 탈춤을 연마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69년 10월 14일 YWCA에서 춤을 가르쳐 주신 네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韓國 民俗 假面舞劇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열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는 감동의 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속의 새로운 재창조를 위한 민예 부흥 운동가로서 1971년 '東亞 民俗 藝術院'을 설립하고 '극단 民族'을 창립하였다.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 ' 민속극 창조 기능의 재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섰고 민족극의 미학을 정립하고자 힘썼다. 서울 한복판 덕수궁 뒤뜰에서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음, 북청사자 놀음, 송파 산대놀이, 산신굿, 마당극제, 판소리 마당굿을 기획 공연하였고, 서울대 고대 연대 등 30여 개 대학에서 마당굿 놀이를 순회 공연하고 탈춤반을 만들어 지도하며 축제 무대 공연을 시도하게 하였다. 또한 '남사당'을 사단법인체로 승격시켜 유랑 예인 집단의 체계적 발전과 정착을 위한 창립 작업에 몰두하였고,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를 기획 연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켜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라는 탁월하고 선구자적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무세중 선생의 첫 출판 '무세중과 전위예술'에 담긴 '전위예술'을 연재하기로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편집자 주) 어느 젊은 날 여름, 한밤 중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잠결에선가 끄적대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종이 위에 쓴것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렇게 자고 먹고 싸고 살다가 언제 어디서 내가 왜 자고 먹고 사는지 모른채 살고 먹고 싸다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치 살고 있는 것이 죽기위한 연습같이 느껴져 몸서리 친적이있다. 나라는 고기덩어리 몸둥아리는 그저 편안한것만 좋아해서 그냥 놔두면 채울것 다 채우고나서 가라 앉으려들고, 마음일랑 속절없이 내팽개쳐 놓을량이면 한없이 달아나 밑도 끝도 없는 황당무개한 곳으로 날아가 까불어대고....... 생겨나길 내 의지대로가 아니어서 인지 운명, 팔자에 몸을 실어 사랑에 속고 돈에우는 가련한 인생에 목을 매고 자폭 자살하는 삶을 살거냐, 어쩌다 지은 德이 있어 있을것 없을것 다 차려놓고 홍이야 청이야 세월가는 줄 모르고 제속을 파먹어가니 제껍데기에 파묻혀 스스로 숨이 막혀 떠나는거냐. 내가 태어난건 내 뜻대로가 아니드라도 돌아가는 길의 선택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는 길을 道, 그것을 엮고 묶고 펼치고 행하는 것을 劇이라하여 道劇이라고 칭하고 삶을 깨 고 삶을 깨닫고 삶을 깨우치는 분골쇄신의 道劇작업을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意識하기 까지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1962년 연극아카데미(드라마센터)에 들어간 이후 1977년 내 개인 창작발표회를 갖기까지 15년간은 자기 발견을 위한 民族本質追求로서의 民俗劇研究와 民藝復興을 제창하여 民衆精神을 모색하고 그것의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傳統을 克服하기 위하여서도 '傳統과의 衝突'를 시도하였고, 새로운 進步 的自我와 전통의 파괴를 통한 전통의 再創造라는 입장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에서 나는 자연 서구 '空間과의 衝突'을 작품으로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밤'이라는 어둡고 차고 잔인한 이중인격적인 白人文明社會에서 충격을 받고 그들 幕 위의 際媒와 횡포를 고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1982년에 돌아와 反이데올로기 · 反테크놀로지 · 反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살풀이'(통·막·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하였고 超現實主義 그림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의 내면 세력으로 유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새로운 얼빛(눈빛, 얼굴빛, 몸빛 등 육체로 발산되는 빛), 새로운 넋소리(목소리, 뼈소리, 살소리, 피소리 등 육체 속에서 부딪쳐 나오는 소리) 새로운 몸짓(손짓, 발짓 등 精氣를 몸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움직임)들을 일깨워 인간 내면에 잠재하는 신비함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의 道劇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항상 이 움추려드는 자기의 벽을 깨고, 항상 生存하는 까닭을 깨닫고, 항상 마음을 비우고 새로움으로 진작하기 위하여 깨우치는道劇思想이 민족의 차원에서 이해 될때는 마치 人道 의 회복에 도극사상의 근본이 있듯이 새로운 민족의 빛, 새로운 민족의 소리, 새로운 민족의 짓을 깨우쳐 나오게하여 우리 민족의 가장 절실한 과제인 統一과 民主에 이바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테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以小事大 즉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룰때 우리 씨름의 원칙처럼 상대방의 힘을 빌려 상대가 스스로 넘어가게 하는 것과 같이 外勢에 침을 놓고 맥을 끊는(Hit and Run) 충격요법으로 자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되는 것이다. 공연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이야기로 뒤집어 씌워 눈물을 안고 쓸어지는 리얼리즘이나 철저하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번갯불처럼 氣와 氣가 교류되고 以心傳心으로 통하고 그리고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퍼포 밍 아트(Performing Art)의 퍼포먼스(공연예술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음), 무엇을 보여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이야기 없는 상황전개에서 느껴지는 암시와 이해되는 상징. 또한 즉흥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순간적인 눈빛, 몸짓, 목소리의 교합 그리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서 생을 풍요롭게 자극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1982년 이후의 창작활동은 내가 봐도 왕성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8년 간의 독일 체류기 간동안 직·간접으로 의식해온 합리주의 사고와 나의 다혈질 정열이 묘하게 어울려 창작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고, 또 정치사회 상황인식에 철저하게 가졌던 나는 내 작품들을 고통, 잔혹의 상황극작품으로 이끌게 된것이다. 어느새 내 나이 쉰셋. 나이 먹으니 헛배도 나오는 몸둥아리로만 추나. 다만 몸을 빌릴뿐인데 머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내 道劇의 세계를 펼쳐 나갈 것이다. 내 모든 바램은 이 나라를 수호하시며 나를 지켜주는 단군 산신령 할아버님과 바다를 지키시는 용신령님의 끝없는 배려 하에 그 염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1988년 12월 무세중
-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위원장, "실제적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인류무형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에서는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아리랑도시 문경'의 정체성과 위상 확립 및 '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와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해 '2021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지난 코로나 기간에서는 방역상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방역지침을 지키며 문경을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문경새재아리랑 알리기와 아직 문경새재아리랑을 제대로 알고 부르지 못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시행해 오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는 사실과 아리랑사에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승, 보급하지 못하였고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에 비교해 전 국민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다. 특히 지난 2020년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만들어(작사, 작곡) 발표한 ‘코로나아리랑’을 함께 교육하고 불러온 아리랑으로써 코로나19의 방역을 계도하고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게 노력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Q: 지난 해를 회고하신다면? A: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2017년 창립된 이후 꾸준히 참여하고 추진해 온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 ‘문경새재' 등 유명 관광지에서 개최하여 총 5회에 걸쳐 921명이 함께 전통 춤사위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참석자들은 단순 관광객을 넘어 ‘문경새재아리랑’을 전파 확산하는 전도사이면서 아리랑홍보대사로서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을 사할린동포와 함께 한 것입니다. 사할린 귀국 동포 100여 명이 새 둥지를 틀어 살고 계시는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연말에 (주)국악신문이 주관하여 추진한 ‘사할린 동포 청소년 장학금 지원사업’에 우리가 작지만 100만 원을 후원하여 아도위 42명 모두 뜨거운 동포애를 나눈 기억입니다.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 68 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펐습니다. 처음 만나서 손잡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아리랑으로 70년 동안 겪으신 이산의 아픔이 치유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날 함께한 행사가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기사가 2번이나 나간 것을 받아 보고 진정한 동포애를 느꼈습니다. Q: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A: 궁극적인 목적은 같지만. 기존하는 각 지역의 ‘아리랑보존회’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아리랑의 주인이며, 아리랑을 향유하는 주체(민초, 백성, 국민)인 순수 민간인들로 구성된 국내 유일 자발적 전승단체입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많은 아리랑에 영향을 주고 여러 아리랑을 파생시켰으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 등 유명 아리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12. 12. 05.),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 지정(2015. 09. 22.),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주제로 ‘아리랑 도시 문경’을 선포함(2015. 12. 13.)에 이르러게 됨에 이에 호응하여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2017. 06. 29)를 창립하여 아리랑에 대한 조사, 연구, 발굴, 보존, 전승, 보급에 역점을 두고 교육과 공연, 아리랑 관련 콘텐츠 개발, 학술발표회 등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모든 아리랑을 품으면서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을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모두 알고 즐겨 부를 수 있도록 하며, 아리랑고개가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경새재’가 ‘아리랑고개’임을 인식하게 하여 ‘아리랑의 성지, 문경새재’가 될 때까지 진력할 것이며 그 상징으로 꺼지지 않는 ‘아리랑의 불꽃’이 영원히 타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Q: 문경시 보호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 제정 이후의 변화와 기대는? A: 2022년 ‘문경새재아리랑(송옥자)’이 ‘문경시보호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고 환영합니다. 아직은 보호문화유산 지정 이전이나 이후의 변화는 희박합니다. 한가지 바램은 전수자, 이수자 등은 문경지역에 뿌리를 둔 문경지역 정서를 지닌 사람이 선정되어 토속민요의 전통성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Q: 문경새재아리랑축제의 2년 연속 휴면 상태에 대해? 타개책은 무엇인가요? A: 우선 선결과제로 ‘대동, 상생, 저항’이라는 아리랑 3대정신을 망각하고 아리랑이란 이름 앞에 아리랑을 욕되게 하고 아리랑 관련인들의 상호 화합을 저해하고 분쟁과 편 가르기를 일삼는 사람이 아리랑을 주무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또 내외부 인사들이 그런 류의 사람과 뇌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지역 내 아리랑 관련인 모두 하나 되길 기원해 봅니다. 문경시는 2015년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다소 성과를 내었지만, 아직도 관에서는 제한적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아도위는 문경시 일원 중 유명 관광지, 휴식처 등 시민,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문경새새아리랑 이론 교육과 노래 교습, 다듬이 체험 등으로 누구나 직접 참여하고 부를 수 있는 마당을 펼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하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축제’가 2년 연속 개최되지 못함의 원인과 대책은 이렇습니다. 첫째, 내분, 편 가르기, 내 아니면 안 된다는 잘못된 우월 의식, 분쟁 조성자의 망동입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리랑 관련인들의‘대동, 상생, 저항’이란 아리랑 정신의 회복과 의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둘째, 관련 기관과 리더가 아리랑에 대한 가치와 인식의 부족함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문화예술 분야의 장르 편향이 아주 심합니다. 예를 들면 축제의 공간에서 트롯트에 치중하고 아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이제 아리랑의 가치 회복과 리더와 관련자들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예산의 편중 지양과 아리랑축제의 쥐꼬리 예산을 해소해야 합니다. 셋째, 아리랑축제 주관 단체를 한 곳에 고정하여 안일, 나태로 변화를 추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과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이 미흡한 것도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축제 주관단체를 공모제로 전환하고 예산하마인 셀럽형 축제를 지양하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축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내 공연 위주의 축제에서 야외 공연(실제적 아리랑고개=문경새재)으로 전환해야 하고, 지역 내 모든 아리랑 단체 및 전문가가 모인 ‘아리랑축제추진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Q: 귀 단체의 새해 역점 사업은? A: 변화를 추구하면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지속해서 추진할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찾아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다. ‘근대 아리랑 시원'은 문경새재아리랑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란 깃발 아래 '제3회 문경새재아리랑 공연과 문경아리랑 알리기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독도를 가는 여정에서 거리에서 '문경새재아리랑 버스킹'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전국 지역 아리랑답사, 전국아리랑경창대회 참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는 계속 이어지는 아도위의 여정입니다. 아도위 자체 사업의 일환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관광객과 함께하는 '아리랑 버스킹' 공연을 관광 시즌에 문경새재에서 열 계획입니다.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역량 강화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Q: 기타 하시고 싶은 말씀은? A: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역사적 사실과 명실공히 ‘아리랑 도시 문경’이란 이름이 빛나기를 바랄뿐입니다.
-
전국 화제가 되고 있는 '울릉도독도아리랑경창대회'처음으로 열리는 '울릉도·독도아리랑전국경창대회'가 전국에서 화제이다. 12월의 마지악 경연대회이고, 특히 독도라는 역사적 배경으로 전국 국악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번달 조회수가 상당히 높다는 사실에서 울릉도아리랑의 존재를 알리는 전국경창대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전국 아리랑전승지역 정선ㆍ진도ㆍ대구ㆍ밀양ㆍ문경 ㆍ영천 등에 이어 지역 아리랑경창대회로써는 10번째가 된다. 경북 울릉군 (사)울릉도아리랑보존회(회장 황효숙)는 오는 23일, 울릉군한마음회관 대공연장에서 ‘제1회 울릉도·독도아리랑전국경창대회 및 제2회 울릉도독도아리랑 축제’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어 다음날 24일 오전 10시에는 사무국에서 아리랑좌담회가 진행된다. 전국아리랑경창대회를 개최하고 있는 영남아리랑보존회와 영천아리랑전국아리랑보존회, 아리랑학회, 아리랑연합회, 울릉도아리랑보존회 및 지역 국악인들과 '울릉도아리랑 전승 발전'에 대한 좌담회가 개최 될 예정이다. ' 이번 전국 경창대회는 민족의 삶, 애환과 희로애락을 소리로 표현한 민족의 소리 아리랑, 대한민국 전 지역에서 파생되고 있는 아리랑과 울릉도의 소리 '울릉도아리랑'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한다. 울릉도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가고 싶은 고향 산천은 못가게만 되고 가기 싫은 왜병정에 소집장이 왔네 창파에 배를 띄우고 순풍에 돛을 달고 동해바다 칠백리 바람결에 찾아가니 울릉도라 우리야 낭군님은 오징어 잡이 갔는데 원수년의 돌개바람은 왜 이리도 부노 동해바다 한복판에 층암절벽 백이십리 굽이돌아 솟았으니 그리움에 울릉도라 대회 참가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가능하며, 지정곡 필수‘울릉도 아리랑’한소절과 자유곡(전국 아리랑 1곡)을 5분 이내로 경창하면 된다. 대회는 명창부, 일반부, 단체부, 학생부 4개 부문으로 1차 예선 심사는 비대면 동영상(3분에서 5분이내), 2차 본선은 단체부와 학생부는 비대면 동영상 심사로 순위를 결정할 예정이다. 명창부와 일반부는 1차 비대면 동영상 심사로 예선을 통과한 참가자를 대상으로 23일, 본대회에서 대면 심사를 통해 순위를 결정해 시상할 예정이다. 경창대회에 이어 오후 3시부터 제2회 울릉도.독도아리랑 축제를 개최해 울릉도 현지에서는 쉽게 접해보기 어려운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영천아리랑, 대구아리랑, 상주아리랑, 성주아리랑, 제주도아리랑 등 전국 각처 토속민요 아리랑을 선보인다. 울릉도 아리랑은 1980년대 김재조 옹(경북 울릉군 울릉읍 사동3리)이 구연한 것을 삼목 김연갑(아리랑연합회 이사장)선생이 채록했으며, 고. 정은하(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 명창이 소리로 재현했다. 이후 아리랑 명인 정은하 전승자로부터 황효숙(울릉도아리랑 전승자) 울릉도아리랑보존회장이 사사받아 전국 경창대회.공연 등을 통해 대내외에 널리 알리며, 울릉도아리랑을 배우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전수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1.2.3편의 가사와 소리를 통해 과거 울릉도 주민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으며, 아름답고 신비로운 관광 섬의 가치와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곳, 국토의 동단 울릉도.독도에 아리랑이 있음을 말해준다. 황효숙 울릉도아리랑보존회장은 "이번 울릉도.독도아리랑 전국 경창대회를 통해 울릉도 아리랑이 전국에 잘 알려져 국토 최동단 독도와 울릉도 섬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이해하고 울릉도.독도를 바로 알았으면 좋겠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울릉도.독도아리랑 전국 아리랑 경창대회를 통해 울릉지역 문화 창달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울릉도아리랑보존회는 2013년 창립되어 '인류무형문화유산' 울릉도아리랑을 복원하여 울릉도아리랑의 위상을 한층더 높이고 국악인 신인을 발굴 육성하고자 설립된 문화예술 단체이다. 울릉도아리랑은 1980년대 울릉도민 김제조 옹이 구연하고 김연갑 선생이 채록한 음원을 아리랑 명인 정은하((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초대회장)의 소리로 재현되어 경상북도가 음반을 발매했다. 2013년 울릉도아리랑보존회 창립총회를 거쳐 2014년 4월 7일 사단법인 울릉도아리랑이 설립되었다. 이후 제2대 회장 황효숙(울릉도아리랑 전승자)씨가 정은하 회장으로부터 울릉도아리랑을 사사하고 울릉도민들에게 가르쳐 오고 있다. 황회장은 2019년 국내외 55개 지지역아리랑보존회가 참가하는 전국아리랑워크샾, 경복궁아리랑고유제, 서울아리랑페스티발과 제3회사할린아리랑제를 통해서 국내외 알리고 있다. 황회장은 회원들과 함께 전국아리랑경창대회가 개최되는 대구, 영천, 문경, 공주, 상주, 정선, 밀양, 진도.경산 등에 참가하여 '울릉도아리랑'과 '독도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다. 지난 10월에 영천아리랑전국경창대회에서 '울릉도아리랑'을 불러서 장려상(명창부)을 수상했다.
-
한국서예술협회 창립전 기념식 성황 이뤄, 150점 작품전(사)한국서예술협회(회장 이종선)가 20일 오후 4시 창립기념 회원전 기념식을 열었다. 이 전시는 중국의 난정서회와 국내에서 국악신문, 월간길벗, 월간서예, 월간서예문인화 등이 후원했다. 20일부터 26일까지 1주일간 한국미술관(인사동 대일빌딩 2층) 전관에서 창립 회원전을 개최한다. 국한문 전 서체에 걸쳐 한국서예의 전모를 볼 수 있는 150여 점의 작품이 다양하게 전시가 되어 서예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10일 서울시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은 한국서예술협회의 목적사업의 일환으로 열리는 첫 번째 행사이다. 한얼 이종선 회장은 인사말에서 "한국서예술협회는 우리서예의 전통계승과 서예 발전을 통해 국민문화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고자 창립하였다. 서예의 본연을 지켜 전통을 계승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서예의 발전을 선도해 나가고자 한다. 본 협회는 이를 위해 서예인재의 발굴과 회원들의 창작활동을 돕는 실질적인 방법을 모색해 나갈 것이다. 기존 서예단체와는 다른 선명한 길을 가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서예술협회는 오거서루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하였다. 서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전기가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아 결성되었다. 회원들도 이들의 문하로 구성되어 있다. 협회 측은 "오늘 창립전을 첫 걸음으로 앞으로 뜻을 같이 하는 역량이 있는 서예가들의 참여를 기대하며, 회원의 구성도 폭을 넓혀 나가고, 참신하고 진취적인 협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특히 회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사)국제서예가협회 회장 정도준 회장은 축사에서 "12월의 끝자락, '한국서예술협회'가 서예 법인단체 창립을 공식 선언하는 창립전을 연다는 소식에 서예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벗을 만난 듯 기쁩니다. 한국 서단은 광복 이후 혼란과 정체기, 성장과 다양화를 거치며 수많은 협회와 학회가 생겨나고 또 사라졌다."며"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서단발전과 인재육성에 기여하지 못하여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때에 '한국서예술협회'의 창립은 차세대 한국서예를 이끌 대안으로서 기대가 크다. 창립 주체의 면면을 볼 때 기존의 단체와는 다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특히 정회장은 "노자에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라 하여 아름드리 큰 나무도 아주 작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9층의 누각도 한 무더기 흙을 쌓는 데에서 시작하며, 천 리의 길도 발밑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는 축사에서 "특히 ㈜국악신문에 '우리 노래 사설(辭說)의 서예화'로 국악계에 큰 자극을 주시더니, 금년부터는 아리랑 사설을 소재로 하여 국악인들의 자긍심을 돋궈 주시는 한얼 이종선님이 앞장 서신다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국악신문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를 통해 서체의 다양함에서 맛보는 미학적 감동은 물론이고, 그 탁월한 사설의 인문학적 풀이에서 큰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며 "우리 국악신문 독자들은 이번 창립전 출품작품에서 서예의 세계와 아름다움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한국서예술협회 강은영 회원은 "붓을 잡은지 햇수로 5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수업을 제대로 다 채우고 나가지 못했다. 이번 창립전을 위해 뜨거운 여름날부터 열심히 작품을 완수했다."며 "선생님께서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 당일 수업에서 한시나 한글 시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국문학적 내용과 감상에 대해 충분히 강의를 해주신 다음에서야 붓을 잡게 하신다." 며 "그런데 그 많은 시 작품을 줄줄 외우신다. 얼마나 읽고 숙지를 하셨는지 놀랍다. 한얼 선생님 서체는 그래서 운율이 살아서 움직인다. 한참 바라보면 제 각각의 서체가 소리를 내면서 나에게 말을 건낸다. 서체는 시가 되고, 이어 노래가 되어 들리기 시작한다."라고 전했다. 가족과 함께 온 회원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서예작품을 설명하면서 자랑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 요새 사라져가는 학교앞 서예학원 실태에 대해 아쉬워했다. "손주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데, 요즈음 애들에게는 인기가 그리 많지는 않다"라고 아쉬워했다. 한 관람객은 "한국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사동에 오면 한번 들려야 할 코스로 소개하고 싶다. 한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서예를 배우고 싶다"라고 전했다. 이번 회원전은 서예를 시작한지 5년 정도 되는 회원들로부터 원로 작가까지 함께한 전국 단위 회원전으로 서예계에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작가의 시각과 해석에 따라 표현되는 다양한 한글의 조형미에 대한 인기는 해외 한국문화 홍보원(한국문화원) 서예교실 프로그램 운영에서 입증이 되고 있다. 유럽 국가에 주재하고 있는 몇몇 한국문화원에서 한류 프로그램 인기와 함께 서예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
울산시 무형문화재에 마두희·판각장 지정산시 중구는 '마두희'가 울산시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고 14일 밝혔다. 중구는 시가 마두희와 판각장을 시무형문화재로 종목 지정하고 보유자 및 단체 인정을 이날 고시했다고 설명했다. 마두희는 1749년(영조 25년) 편찬된 '학성지' 등에 기록됐으며, 1940년대 후반까지 울산읍과 병영을 중심으로 전승된 줄다리기다. '울산마두희(蔚山 馬頭戱)'는 지난 1769년(영조29) 편찬된 학성지 등에 기록이 전하며 1940년대 후반까지 울산읍과 병영을 중심으로 전승된 줄다리기다. 학계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전까지 연행됐던 울산지역의 무형유산으로 전승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울산 중구는 2012년부터 전통 복원과 주민 화합을 위해 축제를 열고 마두희를 재연해왔다. 또 울산마두희보존회가 2017년에 창립해 마두희 보존과 전승을 위해 노력해왔으며, 전수 활동 기여도가 탁월해 보유단체로 인정받았다. 이번에 함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판각장은 나뭇조각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장인으로 전승가치가 높다. 판각장 기술 보유자인 한초 선생은 변상도 제작 등이 능숙한 장인으로 전승 기량, 전승 실적, 전수 활동 기여도 등이 탁월한 점을 인정받았다. 중구 관계자는 "전승 가치를 보존하고 좀 더 계승 발전시킬 수 있도록 계속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유튜브 아리랑 채널 운영자 정창관 선생 따님 시집 보내는 날
- 2제36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06/23) (판소리.무용.기악)
- 3진도군, 인류무형문화유산 강강술래 공개행사
- 4하루키 에세이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2'
- 5두 줄이 내는 다채로운 숨, 해금 연주자 강은일 교수를 만나다
- 610주년 맞는 ‘문화다양성 주간’ 경계에 꽃이 핀다
- 7공연예술로 하나가 되는 '더원아트코리아' 최재학 대표를 만나다
- 8제66회밀양아리랑대축제&제10회밀양아리랑경창대회 26일
- 9전국 271팀 참가한 대구국악제, 영예의 대통령상에는 김선제 씨
- 10(34) <br> 노동은의 ‘잘못된 조건’ 둘, ‘교묘한 조작’